재림교회 발자취
진정한 그리스도교가
발산하는 능력
조지 키오, 메리-앤 키오 부부의 성육신적 사역
1899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첫 번째 선교사들이 이집트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08년 가을 무렵, 재림 신자 10명이 이집트에 있었고, 그들 중 3명이 선교사였다. 약 10년 동안 얻은 현지 교인은 7명뿐이었다. 그런데 1908년 9월 새로운 선교사 2명이 도착했다. 바로 조지 키오, 메리-앤 키오 부부였다.
키오 부부
조지 키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북아일랜드에서 자랐다. 메리-앤은 요크셔 출신이다. 두 지역 모두 다부지고 억센 사람들이 태어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고집과 자기 신념이 필요하기도 했다.
조지 키오는(나중에 그가 기억해 낸 대로) 이집트에의 재림교회 선교 사역이 “지역 주민에게는 전혀 영향력이 없는 외국인 이주자만을 위한 것”*임을 재빨리 파악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랍어를 배우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지역민들이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키오는 현지인들에게 현지 언어로 말하기로 결심했고 아랍어를 배웠다. 결국 아랍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게 됐다. 또 그는 이집트 인구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농부들이 사용하는 아랍어를 배웠다.
그들과 접촉할 길을 열심히 찾아서 키오는 1911년에 카이로를 떠나 상(上)이집트 안쪽 깊은 곳으로 이사했다. 그들의 새 가정은 나일강 상류로 400킬로미터 올라가는 아슈트에 자리 잡았다. 이것은 키오와 그의 가족(1909년에 아들이 태어남)에게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아슈트에는 유럽인들이 정말 거의 살지 않았다. 사실 거기에는 고고학 유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인들은 그 지역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키오 가족은 심각하게 고립됐다.
다가가다
전도할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모슬렘을 개종시키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콥트 정교회 원주민에게 전도하는 일도 그들의 공동체가 워낙 촘촘히 얽혀 있어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1912년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셨다. 키오는 베니아디 마을에서 그리스도인이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던 야쿠브 비샤이 야쿠브와 접촉했다.
야쿠브와 그의 가족은 넷째 계명을 확신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는 유럽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키오에게 편지를 써서 베니아디에 방문해 주길 요청했다. 곧 키오는 야쿠브와 그의 아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 뒤 베니아디에서 가문에 권위를 발휘하며 전체 공동체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닌 족장 한 사람이 키오의 편이 됐다. 1912년 11월~1913년 5월에 키오에게 남자 18명, 여자 7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이집트 전체 재림교인 수는 두 배 이상 늘었다.
키오는 자기에게 침례 받은 이들의 인척 관계를 활용해 베니아디 근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17년에는 추가로 16명이 침례를 받았다. 베니아디, 데니 사아란, 타탈리아 마을과 아슈트시에 교회들이 조직됐다.
이런 침례 수치가 세계의 많은 곳에서는 대수롭게 않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 중동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그 이래로도 거의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온몸으로 전하는 사역
조지 키오는 자신의 가르침을 상당히 미심쩍어한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몸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는 사람들과 사귀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우정을 전략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진심을 읽었다.
수십 년 뒤에 조지는 70~80대가 되어 뉴볼드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20대 학생들과도 친구가 되었는데 젊은 교사들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오늘날 베니아디의 재림 신자들은 서구인들이 결코 해내지 못했던 그 일을 이 유럽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100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를 지금도 꺼낸다. 그는 흙벽돌로 지은 집에 들어가 흙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그들의 음식을 먹었다.
중동 문화에서 환대하지 않는 일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다. 키오가 방문한 집의 주인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음식은 먹음직스럽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중에는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발효되고 짠맛이 나는 이집트 치즈 미시가 있었다. 향이 아주 강했고, 적어도 아슈트 인근에서는 벌레가 무척 많다는 평을 받는 음식이었다. 타탈리아에 사는 한 가족은 자신들의 조모부, 증조모부와 함께 키오가 그 안에 벌레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시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소중한 일화로 간직하고 있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먹음으로써 키오는 그들의 접대를 존중했다. 거리를 두지 않고 그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그들에게 애정을 얻었다. 그는 어린 아들과 여자 아기를 포함해 가족을 데리고 베니아디 안으로 이사해서 그곳에 자기 집을 지었다. 강도들이 흔한 지역이었고 아슈트 경찰서장은 키오에게 가족 4명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키오의 가족은 안전했다. 그들은 그 공동체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현지 적응
조지 키오는 그들의 방언으로 사람들에게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언어를 능숙하게 말하고 썼기에 성경 이야기와 재림교회의 교리들을 알기 쉬우면서도 본래의 충실한 방식으로 상황에 맞게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이 믿을 만하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라는 그리스도교를 전했다.
결과적으로 회심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완전히 동떨어질 필요 없이 계속 소속될 수 있었다. 그들은 쫓겨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역 주민에게 더 잘 증언할 준비를 갖추었다.
결과적으로 상이집트는 언제나 이집트에서 재림교회의 교세가 가장 강한 곳이 됐다. 앞서 언급했던 교회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2012년에 그들을 방문할 특권을 얻었다. 조지와 메리-앤 키오 부부는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지속 가능한 교회들을 개척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힘
나는 2012년에 미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베니아디 교회의 한 장로가 삼촌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말을 전해 들었다. “키오를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교를 보았어요.”
키오는 1943년에 “능하신 구주, 곧 이 땅에 다시 오실 구주에 관한 복음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분명한 진전을 이루길 바란다.”라는 소망을 글로 피력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여전히 그 지역 대부분에서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분명한 진전’을 위한 길을 재림교회는 분명히 배울 필요가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힘이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의 생애에 나타나야 한다.
*인용문은 뉴볼드 대학 로이 그레이엄 도서관 특별 모음집에 수록된 키오의 보고서, 대총회 자료 기록, 키오의 뉴볼드 대학교 제자들과 그의 선교 봉사 추억에 대해 나눈 필자의 인터뷰, 이집트 교인과 필자가 진행한 인터뷰에 근거했다.
데이비드 J. B. 트림 미국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있는 대총회 자료·통계연구부장이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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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베니아디에 있는 키오의 집 바깥 거리에서 함께한 이집트 교회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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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결혼식 직후에 촬영한 조지 키오, 메리-앤 키오 부부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