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를 건너며
빌 노트
혹독하게 추웠던 스물세 살 때의 어느 겨울이었다. 하관식을 거행하는 묘지 앞에 서서 나는 슬퍼하는 유족들을 향해 다음의 글을 낭송했다.
“그리고 모두가 태평하다. 비록 두려운 밤에
믿음과 몸이 찢어진다 해도.
폭풍은 잘도 으르렁대는구나.
저 건너편의 보다 깊은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알프레드 테니슨이 1850년에 친구 아서 핼럼의 죽음을 추모하며 지었던 기념비적인 시 ‘사우보(思友譜, In Memoriam)’의 인용구이다. 이 시는 무덤 주변에 모인 이들에게 필요한 위로, 확신,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열 달 뒤에는 10월의 가랑비를 맞으며 절친한 친구가 안장된 묘지 옆에 서야 했다. 이때만큼은 내 낙천주의가 이상하게 여겨졌다. 제프와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우리는 영어, 화학, 수학 과목에서 1등을 다투었고, 혼성 사중창단과 합창단에서 같이 노래 불렀고, 매일 아침 쉬는 시간에 함께 기도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목사였던 그는 새벽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저 건너편의 보다 깊은 목소리”가 있다고 했던가? 그 목소리를 듣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남들에게 건넸던 격려가 정작 나의 슬픔을 위로하지는 못했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하는 상실은 또 다른 배를 침몰시키려는 갈릴리의 폭풍 같았다. 희망이 순식간에 꺾이고, 대화는 완전히 끊어졌다.
수개월 아니 수년에 걸쳐 또 다른 큰 폭풍들을 겪고 나서야 더 깊은 목소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친구의 사별은 지난 40년간 나의 배를 강타한 수많은 폭풍 중 첫 번째에 불과했다. 또 다른 사고, 무서운 질병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앗아 갔다. 수백 번도 더 낙심하면서 나의 목회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더 나아질 수 있는지, 같은 배를 탄 옆 사람들이 신념과 희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깊은 바다로 나아가 그물을 던지고 놀라운 기쁨을 경험한다. 이 배는 여러 번 호수를 건너다니면서, 주님께서 여전히 말씀으로 수천 명을 먹이는 광경을 목격한다. 훈련받은 수백 명의 손을 통해 그분의 치유하시는 손길이 전해지는 모습을 확인한다. 새로운 회심자들이 물에 잠겼다가 들려져 풍성한 삶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이 울부짖는 밤이 있다. 한때 예수님이 호수로 곤두박질시켰던 마귀들의 분노의 파도가 하나님의 남은 교회를 강하게 때린다. 고기잡이배를 마귀가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가 확인되고 배에는 고통이 가득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 분, 소란 속에서 다시 일어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는 분을 우리는 서로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친구들이여, 항해를 계속하고 필요하면 힘껏 노를 저으라.
크나큰 평화가 이르고 있다. 마침내 주님께서 키를 잡고 다가가실 영원히 즐거운 항구가 있다.
은혜 안에 머물라. 배 안에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