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한 손과 마음 너머로
기쁨은 아침에 찾아온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첫 공식 해외 선교사가 되어 십 대 자녀 2명과 스위스 바젤로 떠난 존 네빈스 앤드루스의 이야기는 귀중한 재림교회 역사이다. 앤드루스는 유명한 학자이자 저술가, 행정가였다. 재림교회는 안식일의 역사에 대한 그의 업적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그의 집필 능력과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개인적인 고통과 상실 속에서도 예수께 매달리려는 그의 의지이다.
그는 하나뿐인 딸을 땅에 묻어야 했다. 6년 앞서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폐결핵에 똑같이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과로와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던 존 네빈스 앤드루스는 누적된 압박과 슬픔에 찌든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의 친구 킨이여, 나는 마치 무감각해진 손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 같네.”1 무감각해진 손과 마음은 기쁨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기쁨이란 무엇인가?
기쁨은 다양한 감정과 상태를 아우른다. 감정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어떤 상태를 나타내거나 즐거운 무언가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기쁨을 깨지기 쉬운 어떤 것이나 금방 사라지는 거품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무언가 더 심오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기쁨은 파란 하늘,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빛, 솜털 같은 흰 구름 그 이상이다. 기쁨은 따뜻한 느낌이나 빠른 해결책을 넘어선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더 큰 신뢰와 경배로 이끄는 기쁨에 대해 여러 기록을 남겼다(욥 33:26; 시 21:1; 42:4; 51:12; 105:43 참조).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의식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팔 안에서 안전하다는 기쁨을 누린다.
기쁨과 역경
기쁨은 성경에서 예상하지 못한 곳에 등장한다. 야고보서 1장 2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말한다. 어째서 성경은 시험(그리스어로 ‘어려운 시험’)에 대해 말한 뒤 곧 이어 기쁨을 언급하는 것일까? 기쁨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기쁨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깨뜨린다. 우리는 기쁨을 역사(또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연결 지으면서, 믿음과 기쁨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시련을 시련으로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려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라”고 격려한다.2 인간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잠재적인 승리, 곧 인간 비전의 한계 그 이상을 보는 믿음으로 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최후의 시련인 십자가 시험을 받아들인 동기에도 그와 동일한 태도가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독려하고 있다(히 12:2). 자신의 피조물을 구원하는 기쁨 때문에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외칠 때조차 십자가의 어두움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고통과 절망뿐 아니라 굴복과 헌신을 듣는다. 예수께서는 가장 어두운 시간을 보내시면서 십자가의 고통 너머를 보시며 대사기꾼인 사탄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던 무수한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기쁨에 대해 생각하셨다. 우리가 사탄의 어둠과 끊임없는 거짓말에서 해방되는 모습을 내다보신 것이다.
십자가 그 너머
어둠과 절망은 십자가의 적절한 배경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규정을 따르지 않은 산헤드린 앞에서 치욕스런 재판을 받으신 뒤 다른 두 십자가 사이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공회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죄인 하나가 다른 죄인들 사이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고통 당하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조롱했던 반면에 (마 27:39~44). 그분을 따랐던 적은 무리의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눅 23:27; 막 15:40~41). 3시간 동안 이상한 어둠이 땅에 깔렸다(막 15:33). 마침내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여 예루살렘이 흔들리고, 무덤들이 열렸다(마 27:51~53). 피조물들이 슬퍼하고, 기쁨은 동에서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예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일요일 아침을 맞이하기까지 안식일 내내 무덤에서 쉬셨다. 몇 여인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기 위해 무덤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님이 안치되어 있던 곳에 두 천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때 때문에 보면서 울고 있는 순간을 요한은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다. 갑자기 마리아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요 20:15).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마리아는 알아채지 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그때 그분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다(16절)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라는 말은 수 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전통적인 부활절 인사가 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어둠이 빛이 되고, 절망이 인정으로 변하며, 인정은 마침내 기쁨이 된다.
진정 기쁨은 어둠, 죽음, 죄책감 그리고 낙담으로 가득한 밤이 지난 후 아침에 찾아온다. 부활의 아침은 역사를 통틀어 그분 안에서 잠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를 미리 보여 주고 있다. 부활의 아침은 사탄이 최후 결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부활의 아침은 희망을 주고 믿음을 불어넣는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천 년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다윗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마음속으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기쁨의 힘이 그대의 삶에 스며들고 있는가?
¹ 다음의 회고록에 근거했다. John Vuilleumier, “Early Days of the Message in Europe-No. 3,” 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Apr. 11, 1929, p. 11 2013년 재림교회 유적지 탐방 때 인용문을 소개해 준 짐 닉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² Kurt A. Richardson, James,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Holman, 1997), vol. 36, p. 58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이 변했다. 어둠이 빛이 되고, 절망이 인정으로 변하며, 인정은 마침내 기쁨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