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집
빌 노트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어린 시절의 추억, 가정 예배, 성경이 안개처럼 겹치는 내 마음의 어느 지점에는 다윗의 회개 시편에서 아버지가 인용하여 읽어 주신 위의 구절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5살짜리 꼬마에게 모든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즐거움이 뭔지도 모르는데 어찌 즐거움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는가? 시편 51편의 이 기묘한 구절 두 줄을 나는 ‘이다음에 커서 알게 될 사항’으로 남겨 두었다.
한편, 계속되는 명백한 잘못들로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때도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형제들과 다퉜고, 장난감을 빌려주지 않았고, 시킨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고 어린 마음에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즐거움’은 닿을 수 없이 아득해 보이기만 했다.
십자가 이후 수백 년 동안 신실한 신자 수백만 명에게도 기쁨이란 그런 것이었다. 기쁨이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자연히 얻는 결과라고 우리는 추정해 왔다.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마치 지저분한 낙서가 꼼꼼하게 지워진 칠판인 것처럼 이해했다.
그러나 삭제되어 텅 빈 상태 자체가 즐거움의 상태는 아니다. 죄, 회개, 자백, 용서라는 익숙한 반복만으로는 시편 기자가 간구했던 선물의 문턱밖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은 극히 적다. 예수님이 우리의 일상에 실현시켜 주고 싶어 하시는 경험의 변두리만을 우리는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라고 예수님이 자신의 바람을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말이다.
용서는 필수 사항이지만 기쁨으로 완전하게 인도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은혜의 집으로 발을 들여야 한다. 은혜의 집은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근본적인 자비를 경험하는 깨달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 앞에 완전히 거하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깊은 사랑을 더 깊이 확신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분의 사랑을 마침내 신뢰할 수 있고,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즐겨 치유하려고 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저자 엘렌 G. 화잇이 5권으로 된 ‘대쟁투 총서’의 시작과 끝으로 삼은 글귀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지금도 여전히 기쁨을 보증하는 서명이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종종 반복해서 선언하시는 이 말씀이 믿어지기 전까지 우리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방랑자로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즉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믿음은 5살, 15살, 50살이 되어도 완전히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기쁨 안에는 분에 넘치는 사랑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경험이 존재하며, 행복이라는 우리의 잔을 아버지께서는 늘 채워 주신다는 보증이 담겨 있다.
이번 달 특집을 접하면서 지금까지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깨움과 기쁨을 얻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은혜 안에 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