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기둥 옆에 그 여인은 가녀린 덩굴을 심는다. 씨앗 안내서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자홍빛 꽃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황홀해진다.
흙을 파서 잡초를 뽑고 조심스럽게 돌을 제거하고, 아름답게 피어날 꽃들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릴지도 모를 벌레들을 골라낸다. 매일 아침 8시가 되면 그 여인은 아무런 기미도 안 보이는 여린 덩굴에 초록색 주전자로 물을 반 리터 뿌려 준다. 읽고 또 읽은 안내서를 틈틈이 펴서 같은 말을 재차 확인한다. ‘성장 보증’
올해는 꽃 피우기에 이미 늦었으므로 이번 여름에는 잎사귀만 나오겠지만, 마치 세상의 운명이 거기 걸려 있다는 듯이 그 여자는 잎사귀들을 소중히 보살핀다. 자신의 상을 토끼들이 낚아채게 할 수는 없다. 두더지나 들쥐가 겨울을 나겠다고 그 뿌리를 갉아 먹게 해서도 안 된다. 눈이 쌓이지 못하게 비닐 가리개로 잎사귀를 덮는다.
그 여인이 기다리는 것은 두 번째 봄이다. 새싹 하나하나가 돋아날 때마다 희망도 그만큼 커진다. 솟아난 꽃봉오리는 더 많은 봉오리가 나타나리라는 신호이다. 그에게 만약 손주가 있었다면 쏟아부었을 그 사랑으로 덩굴 여기저기를 살핀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맞은 어느 봄날 아침, 자홍빛을 뿜어 내는 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이웃집 장미와 들판의 라벤더 모두를 합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꽃 한 송이다.
그는 영혼의 수고를 겪었고 그 수고에 흡족해한다.
이번 달 『애드벤티스트 월드』에서는 재림교회와 기독교 신앙의 중심 덕목인 ‘인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황홀한 자홍빛의 실현을,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원한 아침의 일출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인내에는 더 나은 것, 더 영광스러운 것을 향한 기대가 한데 얽혀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에는 목적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덕목은 끈질김만이 아니다. 그런 특성이라면 기생식물이나 이끼에도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훌쩍 뛰어넘는 성취를 우리는 희망차고 간절한 염원 속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의 인내는 도덕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의 기다림에는 목적과 의식이 있다. 다가올 아름다움을 꿈꾸는 기다림이다.
우리에게 인내할 힘을 주시는 위대한 선각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그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한글킹제임스). 멋진 나라는 시련을 힘겹게 참기만 해서 얻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눈으로만 이따금 내다볼 수 있는 그 즐거움을 위해서는 뜻을 두고 시련을 이겨 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관하여 이사야는 700년 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사 53:10~11).
덩굴은 자라나고 꽃은 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종종 여리고 약해 보이지만 언젠가 “모든 민족과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되어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을 것이다(계 7:9, 한글킹제임스).
뜻을 두고 기다리라. 멋진 날이 온다.
멋진 순간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