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인가 고독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자!
23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는 집에만 있다. 코로나19 증상은 없지만 외로움의 징후가 있다. 이것이 감염병 대유행 시기에 많은 사람이 겪는 고충이다.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무시해야 할까?
2020년 4월
나의 일상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지 몇 주가 지났다. 봉쇄와 규제, 재택근무, 격리가 지난 몇 주 사이에 일어났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식료품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것조차도 사람과 직접 대면하기보다 그냥 재빨리 이루어진다. 쇼핑하는 동안 사람들 대다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화상 통화가 효율적이라고는 해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 접촉하면서 얻는 교감을 대체할 수는 없다. 더 심오한 질문이 제기된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삶에서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나는 왜 혼자인가? 내일은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새날을 맞이할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내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이 내용을 기도장에 적었다. 코로나19는 청년인 나의 감정에 영향을 준다. 감정들을 무시하는 대신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어떻게 지내니?’ ‘그다지 좋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고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그립다. 성경은 실제로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창 2:18), 혼자가 되어 보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속에서 우리의 필요는 밖으로 드러난다.
오래전 이야기
오래된 한 성경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는 성공적이고 매우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부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흠이 없으며 정직했다.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의 가축은 자연 재난으로 도난 당하거나 말살되었고 그의 모든 자녀는 죽었다. 그는 며칠 만에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것도 부족했던지 그는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리고 만다. 이 모든 사건이 그의 아내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다.
욥은 어떻게 이 모든 시련을 헤쳐 나갔을까?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 그의 확신은 어디서 왔을까? 무엇이 그에게 그러한 상황에서도 신실함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주었을까?
욥은 훌륭한 역할 모델이다. 그는 고통에 대처하는 법을 알았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 5:11).
인내
쉬운 해결책이 없을 때는 인내가 필요하다. 욥은 그의 이야기의 결말을 위해 인내해야 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는 인내할 힘을 얻었다. 자신이 누구를 믿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잘 풀릴 것을 예상하였다. 하나님이 긍휼하시고 자비롭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진정 누구인가?
욥은 자신의 부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위로부터 받은 복으로 간주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우리는 우리의 소득, 재산, 친구 또는 가족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문제가 생길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하나님과 가까웠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불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는데 왜냐하면 마지막에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경험을 통해 욥에게 당신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셨다.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능력
욥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욥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서 헤쳐 나갈 능력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고 권면한다. 우리의 고통과 문제는 우리에게 은혜를 채울 하나님의 기회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간구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 강해진다. 하나님은 아프거나 피곤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욥의 시대에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마무리하면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여러 관계에 어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한 나에게 이 상황은 그분과 관계를 깊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욥은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외로움을 이해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예수님이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주님께서도 당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시고 감응하신다”(2기별, 237).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말하기 위해 홀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고독을 구했다. 이 고독의 시간이 그분을 강하게 하였고 타인을 섬길 수 있도록 했다. 고독은 외로운 감정과는 다른 조건이다. 외로움은 없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고독은 홀로 뭔가를 하는, 일종의 경계를 짓는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외로움은 내가 혼자임을 받아들이면 사라진다. 그것은 내 주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해 나가는 중요한 단계이다.
외로운 순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궁핍한지를 더 깊이 깨우칠 수 있음을 나는 배웠고 아직도 배우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빌 4:19). 또 2020년은 나에게 지금이야말로 친화적인 새로운 결속 다지기, 고립을 딛고 ‘계속 연락’하기로 결심하기, 관계 강화하기 등의 목표를 세워야 할 때임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스스로 물어보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관심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코로나의 기적적인 종식보다는 이 위기를 잘 대처해 나갈 방법을 찾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제한 없이 서로 교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곧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샤이나 스트림부 오스트리아 교회연합의 청소년부장이며 오스트리아 빈에 살고 있다.
발문
외로운 순간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궁핍한지를 더 깊이 깨우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