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어 오르는 기술
탄성력을 기르는 세 가지 성경 전략
공은 튀어 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을 재미있어 한다. 그 재미에는 과학적인 것이 뒷받침되어 있다.
공은 충격을 흡수해서 그 에너지를 반대 방향으로 전달하도록 설계되었다. 공은 바닥을 치면서 “일시적으로 변형되었다가 반대로 쏠리게 된다. 내부의 공기가 스프링처럼 작용하여 압축되었다가 다시 팽창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탄성력이라고 한다. 이것은 압축 응력으로 변형된 몸체가 크기와 모양을 회복하는 능력이라 정의할 수 있다.
충격에 의해 튀어 오르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불행한 경험의 영향에서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을 기르지 않는다면 무너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만 한다.
그대가 누구이든 이 세상 어디에 살고 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그대는 고난의 경험을 통과했거나 고난 가운데 있거나 또 다른 고난의 경험을 이제 통과하려 한다는 것이다.
삶에서 겪는 고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할 것이다”(요 16:33, 새번역).
“너희는 환란을 당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너희는 환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벧전 4:12, 새번역)라고 기록하였다.
고난과 시련, 난처한 일과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삶에 틀림없이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물음은 “나의 삶이 그러한 어려움에 영향을 받을 것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하게 나에게 오는 그 어려움들을 어떻게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극복해 낼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삶의 역경의 에너지를 흡수하여 깨어지지 않고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여기에 우리를 역경으로 넘어뜨리려 하는 세상에서 회복 탄성력을 키우는 세 가지 성경적 전략을 소개한다.
1.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라
여러분도 확실히 느꼈다시피 기독교는 종교적 유명 인사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록스타’급의 대형 교회 목사나 카리스마 있는 전도자에게 반하여 그들을 의존하면 그들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만다. 우리가 확실히 믿었던 목사님이나 장로님, 아빠나 엄마 또는 친구 등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들에 대한 실망 때문에 마침내는 예수님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일례로 라비 재커라이어스(1946~2020)와 관련한 최근의 스캔들은 아무리 의롭고, 재능이 있고, 지적이거나 카리스마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우리게 보여 준다.
무대의 강연은 가장 취약한 형태의 복음 증언이다. 이 방식은 속이기도 쉽다. 동기가 무엇이든지 부드러운 혀로 사람을 속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반대로 가장 강력한 복음 증거는 투명함, 책임, 진실함과 은혜가 넘치고 끊임없는 구원의 과정이 있는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이 넘치는 지역 교회이다. 진실을 말하고 은혜를 나누는 사람들의 사랑 어린 공동체 자체가 복음을 증언하는 주요 수단으로 작용해야 마이크를 든 강연자가 설령 약탈자나 사기꾼으로 판명되더라도 아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무대에 있는 사람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히 12:2)를 바라보는 습관을 기르라고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한다면 우리가 존경하던 누군가가 우리를 실망시킬 때 경험하는 낙담으로부터 되튀어 오를 수 있는 탄성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탄성력을 키우는 두 번째 전략으로 우리를 이끈다.
2. 공동체 안에 머물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접속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분리시킨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가장 부적절한 명칭은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를 팔로우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과의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서로 진정한 “사귐”의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는다(요일 1:1~4).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며 시청하는 그 교회가 여러분의 ‘교회’라고 부르는 유혹을 받겠지만,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 지역 교회의 활동적인 일원이 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삶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탄성력을 지니고 다시 튀어 오를 가능성이 상당히 증가할 것이다.
3. 주기 위해 살라
어떠한 어려움에서 다시 되튀어 오르는 최고의 해결책은 고통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긍정적인 활동으로 돌리는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 우리를 칠 때, 우리는 두 방향 중 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안으로 또는 밖으로. 어떠한 역경에 의해 생긴 에너지는 어딘가로 나가야 한다. 만약 내가 나의 문제와 고통에 사로잡혀 내 안으로 에너지를 쏟는다면 그것은 확대되어 점점 더 내 안의 감정적인 공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의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는 데 쏟는다면 주는 것의 부산물로 생기는 기쁨 안에서 나의 문제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라고 예수님은 권면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자신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절제”(갈 5:23; 벧후 1:6)의 열매를 맺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절제는 부정적인 훈련이 아니다. 사실 자신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된다’고 말하도록 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훈련이라 할 수 있다. 존 웨슬리의 오래된 재정 권고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빛을 발한다. “할 수 있는 한 벌고, 할 수 있는 한 저축하고, 할 수 있는 한 주어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정의는 세상에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절제의 습관을 기르는 것은 복의 전조이다. 우리의 방종적인 욕구에 안 된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합법적인 필요에 ‘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주는 사람은 그들의 관심이 안으로가 아닌 밖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탄성력이 있다. 좌절을 극복하도록 타인을 도우며 자신의 삶에서 겪는 좌절로부터 튀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공은 튀어 오른다.
당신은 어떠한가?
*Sabine De Brabandere, “Energetic 2-Ball Bounces,” Scientific American, April 13, 2017, online at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energetic-2-ball-bounces/.
타이 깁슨 라이트 베어러의 책임자 및 설교자이며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