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달인
그 이야기의 끝을 알고 계시나요?
실비아 렌츠
“할머니, 재미있는 이야기해 주세요!” 나는 할머니의 따뜻한 침대로 기어 들어가 할머니께 애원했다. 할머니는 길게 숨을 내쉬셨다. 아마 좀 더 주무시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등을 껴안으며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성전의 작은 사무엘, 물매를 가진 용감한 다윗 그리고 모든 어린이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정답게 들려주셨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야기를 즐겨 하신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까? 예수님은 성경의 저자들이 화학 공식을 적도록 영감을 불어넣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성경은 천문학적 계산, 공학 공식 또는 쿼크(역자 주: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소립자를 구성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기본적인 입자)와 광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이 세상에 관한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후에는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은 성경의 저자들에게. 퍼즐의 조각을 하나하나 더하며 많은 사람이 그분의 위대한 이야기에 기여했다. 이러한 조각들의 일부는 그림 틀의 일부나 구석의 일부가 된다. 전체적인 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어떤 곳에는 아직 조각이 맞춰지지 않은 곳도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그냥 남겨 둘 수도 있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도 있다.
말로 된 그림
인간 이름이 ‘예수’인 솜씨 있는 발명가를 떠올리며 우리 마음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 내니 상상력은 창조주가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그분은 창조하신 놀라운 동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해 주신다. 먹이를 유인하기 위해 자체 램프로 빛을 내는 발광 심해어를 생각해 보라. 불행히도 우리가 다소 싫어할지도 모르는 사실, 즉 발광 심해어가 호기심 많은 작은 물고기를 먹으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위대한 이야기의 먹고 먹히는 어두운 면을 잘 보여 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대적에 의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에덴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그 후 뒤따르는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창세기의 저자는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을까? 비디오를 시청하거나 이상을 보았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창조와 타락이 어떠하였는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결국 모세는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이야기하는 특권을 누렸다(출 33:11). 모세에게는 동영상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탁월한 이야기의 대가가 청자들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도록 그분의 언어를 선택하실 수 있으니 말이다. 마치 창조주가 무성한 정원을 말씀으로 만드시고, 땅을 뚫고 재스민 관목이 자라게 하시고, 땅의 표면이 갑자기 부드러운 초록 카펫으로 덮이게 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보는 것처럼 말씀해 주셨을 테니 말이다.
모세는 맑고 오염되지 않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번쩍이는 청어 떼를 보았다. 그는 고래의 사랑 노래를 들었고 그의 심장의 고동은 평원을 가로지르는 아라비아 말의 말발굽 소리와 조화를 이루었다. 창조주께서는 아담에게 생명을 주는 숨을 불어넣으면서 얼마나 조화롭게 아담을 창조하셨는가! 그리고 코끼리, 얼룩말, 꼬리감는원숭이의 이름을 짓도록 아담에게 이끌었다.
갑자기 아담은 이 야생 동물원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창조주께서 첫 번째 인간 피조물의 눈에 서린 깊은 갈망을 보시고 그를 땅 위에 눕히시고 그의 눈을 감기셨다. 아담이 잠든 사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시고 부드럽고 살아 있는 조직으로 그 틈(이전에 딱딱한 뼈가 있던 곳)을 막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남편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다.
이 이야기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많이 써서 이야기되고 있어 읽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담은 하와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로 그의 반쪽으로 정확히 인지한다. 나눌 수 없다는 몇 단어와 문장에서 우리는 이미 행복하고 조화로운 결혼을 위한 ‘사용 설명서’를 인식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젊은이나 노인, 교육받은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 모두에게 이해되도록 시대를 초월한 단어로 전달된다.
스릴러, 드라마, 사랑 이야기
족보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3~5). 족보의 각 이름은 하나의 이야기, 가족 드라마 그리고 희망을 나타낸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비참한 비극으로 오싹 소름이 끼치는 순간들이 있지만 동시에 굽은 길을 펴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가리키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신약의 저자들처럼 우리는 성경 전체가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을 믿는다(딤후 3:16). 실패와 승리의 모든 이야기는 결함 있는 인간 ‘서기관들’을 사용하시기에 주저함이 없으셨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신뢰를 돈독히 하기 위해 쓰여졌다.
서스펜스가 연속되는 드라마와 기억 도우미
이야기의 대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을 때 그분은 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법을 아셨다. 매일의 삶에서 떠올릴 수 있는 천 개의 비유는 기억 도우미의 역할을 했다. 누룩, 눈의 들보, 기운 옷,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까마귀와 백합, 산 위의 동네 등. 이러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예수님은 그분의 가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보여 주셨다. 그분은 종종 재미있는 이야기에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분의 생각을 옷 입히셨다. 그분의 비유는 청중을 위해 매일의 상황으로 덧입혀졌다. 결혼 지참금인 은전 중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려 집 안을 다 뒤지며 샅샅이 찾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 양 한 마리가 너무 소중하여 피곤하고 지쳐 있지만 먼 길을 돌아 산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양을 부르며 찾는 목자의 이야기. 어린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들과 연결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했다.
신약 성경에는 50가지 이상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그런 경우이다(눅 10:30~37). 우리는 문자 그대로 어떻게 제사장이 자신의 깨끗한 의복을 움켜쥐고 혐오스럽다는 듯 다른 길로 지나가며 피 흘리는 그 사람을 지나쳐 걸어가는지 “볼 수” 있다. 자신을 더럽게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다른 편으로 지나간다. 하지만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다가온다. 우리도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의식이 없는 그 남자를 몸을 구부려 쳐다보고 있는가? 우리도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싸매려고 그 사람과 함께 포도주 가죽부대를 찾아 가방을 뒤지는가? 다친 그 사람을 나귀 등에 올리면서 사마리아인이 내는 신음 소리가 들리는가? 다음 여인숙까지는 아직 멀지만 어떤 것도 사랑의 봉사를 하려는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는 밤새 빌린 방에서 자신의 피곤함도 뒤로하고 그 상처 입은 사람을 돌보았고 아픈 사람을 돌보도록 여분의 돈도 주인에게 건넨다.
현대의 독자들이 위험한 길에 대한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여러 구제 조치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그 장면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도 또한 누가 그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지에 대한 질문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가? 그래서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호소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이다.
장애물
예수께서는 결코 복잡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셨지만 때때로 그분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예수께서 그분의 고난을 준비하실 때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눅 18:34, 새번역). 그들은 왜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기대와 관련이 있었을까? 결국 베드로는 자신의 주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내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반대하는 꼴이 되어 버렸는데(마 16:21~23 비교하기), 이는 그 길이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념과 귀중히 여기는 의견이 우리 주님의 대가다운 이야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마태복음 13장 11~13절에서 예수님은 종종 그분의 생각에 이야기를 덧입히시는 또 다른 이유를 더하신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분의 행동을 기억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이야기의 대가이신 분께 열 때만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일은 우리의 교사,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행하시도록 할 때만 이르러 올 수 있다(요 16:13).
귀중한 보석
이러한 이야기들은 보석처럼 귀하다. 제자 요한이 밧모섬으로 추방되었을 때 하나님의 천사는 그에게 파노라마가 있는 이야기로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다. 천사는 벽과 문을 금 갈대자로 측량하였다. 그 측량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규모를 보여 준다. 금 거리, 벽옥, 사파이어, 옥수, 에메랄드, 홍마노, 홍옥수, 감람석, 녹주석, 황옥, 녹옥수, 청옥,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주춧돌들을 보여 준다. 모든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그의 가슴에 이러한 귀중한 보석을 찼다. 그것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소중히 여김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출 28장; 계 21:19~20).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제사장의 어깨 위의 호마노에 새겨졌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안에서 빛나고 반짝이는 이러한 귀중한 보석이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나는 특히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발견되는 ‘미니 스토리’에 감동을 받는다. 이 미니 스토리는 ‘엄청난 내용’을 품고 있다. 몇 마디 말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한 영역을 묘사한다. 새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다음의 말은 위대한 개요를 보여 준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그분의 이름이 내 이마에 있다. 내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있다는 말보다 우리와 함께 영원을 보내기를 갈망하시는 그분과의 연결과 변화를 더 잘 묘사하는 말은 없다.
발문
이야기의 대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을 때 그분은 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법을 아셨다. 매일의 삶에서 떠올릴 수 있는 천 개의 비유는 기억 도우미의 역할을 했다.
실비아 렌츠 여러 책을 출판한 작가로 독일의 알스바흐-핸라인에서 남편 베르너와 함께 은퇴의 삶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