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곳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곳이든 교회가 될 수 있다.”
미술관이 묵상이나 기도로 남의 눈길을 끄는 장소가 되는 경우란 흔치 않다. 세심하게 전시된 그림들은 보통 웃음, 비극, 고통이 한데 섞인 인생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다루는 화가들의 천재성, 대담한 색 감각, 친밀한 얼굴 묘사에 감탄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미술은 우리의 삶과 행위와 경쟁 그 모두가 시간의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우리 존재의 이정표이다. 심지어 가장 뛰어난 종교 예술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기리는 것일 때가 많다.
그런데 미술관을 거닐다가 기도하게 된 날이 있었다. 워싱턴 D.C.에서 19세기 미국의 화가 토머스 콜의 그림을 전시할 때였다. 지역 언론과 국내 주요 언론에서 일제히 비평가들을 인용해 보도한 ‘초월성’ 즉 인간에게서 시작하지 않고 인간의 업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감상이라는 말에 눈길이 끌렸다.
모처럼 언론의 보도가 실망스럽지 않은 경우였다. 콜의 감동적인 작품은 내가 ‘고향’으로 여기는 지역을 그림에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재능 있는 수많은 사람이 놓친 것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미국 북동부의 캣스킬산과 버크셔산을 그려 놓은 토머스 콜의 작품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어떤 그림에는 그 자신이 창조하지도 않았고 지배할 수도 없는 거대한 세상에 움츠러든 아주 작은 사람이 딱 한 명만 묘사되어 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자신보다 무한히 위대한 세력 앞에서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인간의 도구(화가의 이젤과 붓)만 그림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고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캔버스 위에서 인간의 이야기는 콜의 작품에 묘사된 처지와 똑같다. 전쟁의 승리, 정치적 권세, 심지어 인간의 경건도 어느 것 하나 자랑할 게 없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
그래서 나는 기도했다.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두 손을 들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과 가장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인 침묵 속에서. 나를 여전히 사랑하는 하나님이 지으신 무수한 은하계 속에서 먼지만도 못한 나의 처지를 제대로 인식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만날 만한 곳에서만 만나는 게 아니다. 신자들의 예배와 기도는 조용한 아침이나 교회의 공중 예배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 속에서, 집을 지으면서, 미디어를 활용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계 3:22)에 더 깊이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의 둔한 감각이 일깨워져 끊임없이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