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로페스 미란다
라틴아메리카의 재림교인 순교자
푸에르토리코의 첫 번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은 영적 생애의 시작이 순조롭게 않았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 라파엘 로페스 미란다(1883~1922)는 종종 알코올에서 위로를 찾았고 툭하면 화를 내며 아내와 자녀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쁘게도 어느 재림교회 선교사가 1912년, 푸에르토리코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로페스가 반응했다. 그는 성경 연구 모임과 기도회에 참석하고 마침내 침례를 받았다.1 재림교회 역사가 M. E. 올슨에 따르면 로페스는 푸에르토리코의 첫 번째 사역자였다.2
로페스 미란다는 이후에 도미니카공화국을 여행했고 1919년 무렵, 베네수엘라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성경 예언에 관한 A. O. 테이트의 고전 『그날 아침의 전령』을 스페인어로 새롭게 번역한 책자들을 판매했다. 정글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재림 기별을 받아들인 어느 가정을 만났다. 이 가족과 더불어 다른 이들이 함께했고 그들은 신자 35명의 모임으로 성장했다. 그런 성공을 이루자 질투심이 일어난 지역 종교 지도자들이 폭도들을 선동해 로페스 미란다의 서적들을 불태웠다. 이런 악착같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은 진리로 가득한 귀중한 그 책자들을 끈기 있게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빛을 찾아서
1920년 6월, 검은색 정장을 입은 키 작은 한 사람이 가게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그의 순진한 미소와 눈에 있는 작은 결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모자를 벗었을 때 그의 머리는 벗겨져 있었다. 이 특이한 사람이 그에게 걸어와 손을 잡고 스페인어로 물었다. “훌리오 가르시아 씨입니까?”3
로페스가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와 말을 튼 사람들은 그에게 마을 사람 훌리오 가르시아가 기독교 서적에 관심이 있다고 귀띔했고 가르시아를 만날 수 있는 상점으로 그를 데려다준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 이름은 라파엘 로페스입니다.” 그는 그런 다음 자신에게 있는 건강 서적 한 권을 소개했다. 약 10분 뒤에 가르시아는 그 책을 사기로 했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로페스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은 “집도 나라도 없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날 오후, 로페스는 가르시아의 집에 방문해 그의 가족을 만났고 함께 성경을 연구했다. “저는 지난 수년 동안보다 한 시간 반의 그 성경 연구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게 있는 성경책을 가지고 말이죠.”라고 가르시아가 말했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 그는 내게 기도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떨리는 음성으로 떠듬떠듬 하나님께 간청을 드렸습니다.”
로페스는 다음 날 아침 5시에 한 번 더 가르시아의 집을 방문했다. 자기 나귀를 타고 떠날 때 그가 ‘권고와 훈계’의 말을 해 주었다고 가르시아와 그의 가족은 회상했다.
박해와 영적 결실
1920년 7월 3일, 가르시아의 가족은 첫 안식일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이 결정으로 전에 모르던 ‘평안’을 누렸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해 10월에 그들은 베네수엘라 카마구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첫 17명의 일부가 됐다.
1921년 1월 6일, W. E. 백스터 목사와 D. D. 피치 목사가 가르시아의 가정을 방문했다. 그때 어떤 이들의 사주로 대규모 폭도가 그들의 집 밖에 모였다. 그들은 “훌리오 가르시아의 사제들이 납시었네.”라며 조롱했다. 그 무리가 200명까지 늘었을 때 훌리오 가르시아는 차라리 땅이 자기를 삼켜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백스터 목사는 난간에 서서 그 무리를 조용히 시키고 그들에게 뛰어난 에스파냐어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말했다.
후에 그해에 가르시아 가족은 독감에 걸렸고 아이 둘이 목숨을 잃었다. 로페스는 가르시아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를 북돋았다. “믿음이란 일이 잘 풀릴 때만 발휘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후에 또 가르시아는 다른 신자 여섯 명과 함께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무고하게 수감됐다. 결국 카라카스에 있는 친구들이 국가수반인 후안 빈센트 고메스와 접촉했고 그가 이 문제에 개입했다. 그들은 갇힌 지 8일 뒤 아침에 풀려났다. 그들이 교회에 걸어 들어왔을 때 남아 있던 신자들은 그들의 석방을 기적이라고 말했다.
결국 희생당하다
로페스는 말라리아에 걸려 한동안 푸에르토리코의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회복된 뒤에는 베네수엘라에서의 자기 일을 다시 시작했다. “저는 일하러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심지어 제 생명을 값으로 치르더라도요.” 이 불길한 말 이후에 그는 또 다른 편지를 보냈다. “대회 사무실에서는 제 생명이 여기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라고 충고했습니다. 바로 어제 정글 칼로 제 목숨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진리에 관심을 쏟는 18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탄 나귀는 습격자들을 따돌렸다. 상황이 심각한 데도 정부 관리들은 대회의 신변 보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칠 되지 않은 1922년 5월 15일에 로페스는 나귀를 타고 안데스에 있는 외딴길을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 총알이 날아왔고 그는 나귀에서 떨어져 사망했다.4 친구들은 나중에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현금을 발견했다. 살해 동기가 강도가 아니었다는 증거다. 그의 살해 사건을 조사했던 다른 선교사가 나중에 그의 서적 주문서를 전달했다. 그가 살해당한 곳에서 가까운 엘코브레 시내에는 마침내 재림교회가 건축되어 이 ‘안데스의 순교자’를 조용히 기념하고 있다.
자신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친구 로페스가 베네수엘라의 안데스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르시아의 가족은 ‘뜻밖의 비보’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이 더 나은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들의 믿음은 큰 시련을 당했다.
살해자들을 조사하다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대회 지도자 D. D. 피치 목사는 로페스 형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고자 나귀를 타고 1,000킬로미터나 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로페스가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산크리스토발에 있는 여관임을 그는 알게 됐다. 여관의 여주인은 로페스가 매일 아침 자신과 함께 기도했다고 피치 목사에게 말했다.5
로페스가 고꾸라진 시냇가의 땅바닥에 작은 나무 십자가가 표시되어 있는 것도 발견했다. “저는 이 산길을 다니면서 그런 십자가를 수없이 보았습니다.”라고 피치는 말했다. “각 십자가는 어떤 이가 살해당한 지점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철십자가로 교체했고 거기에 로페스의 이름과 사망 날짜를 새겨 놓았다.
11일 뒤에 습격자 중 두 명이 체포됐다. 그들의 소지품에서 총탄 자국이 있는 로페스의 모자가 발견됐다.
훌리오 가르시아는 후에 로페스를 라틴아메리카에서 재림 기별을 전하다가 습격자에게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의 순교자’라고 묘사했다.6
1 그의 생애에 관하여 『Encyclopedia of Seventh-day Adventists』에서 ‘Rafael López Miranda’를 찾아볼 것. https://encyclopedia. adventist.org/article?id=GHHM&highlight=lopez; 『Review and Herald』, Aug. 10, 1922, p. 22에 실린 그의 사망 기록도 참조할 것.
2 M. Ellsworth Olsen, A History of the Origin and Progress of Seventh-day Adventist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25), p. 547
3 When he entered the town, Rafael López Miranda was told that Julio García was interested in Christian literature, so he went in search of him. 우리가 시내에 들어갔을 때 라파엘 로페스 미란다는 훌리오 가르시아가 그리스도교 서적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를 찾아 나섰다.
4 여러 자료에 따르면 총탄은 5개, 9개 또는 12개로 확인된다. 개수의 정확성에 상관없이 가까운 동굴에 매복하여 기다린 강도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다.
5 D. D. Fitch, “The Murder of Brother Rafael Lopez,” Review and Herald, Jan. 4, 1923, pp. 18~19
6 Julio García, “A Martyr for Christ,” The Life Boat, September 1923, pp. 260~261, 273, 275~277.
마이클 W. 캠벨(Ph. D.) 미국 텍사스주 킨에 있는 사우스웨스턴 재림교회 대학교 신학과 교수이다. 팟캐스트 ‘안식일학교 레스큐(Sabbath School Rescue)’와 ‘재림교인의 순례(Adventist Pilgrimage)’를 공동 주관하고 있다.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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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되기 전날 밤에 라마엘 로페스 미란다가 묵었던 숙소
카라카스에 있는 최초의 재림교인들. 둘째 줄 가운데가 라파엘 로페스 미란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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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로페스 미란다가 38~39세였을 때의 모습
“어제 정글 칼로 제 목숨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한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진리에 관심을 쏟는 18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라파엘 로페스 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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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로페스 미란다가 묻힌 엘코브레 공동묘지
카마구완에서 훌리오 가르시아(가운데)와 그의 아내 에밀리아에게 침례를 주는 W. 백스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