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는 세상에서 봉사하며 살기
세상이 끝을 향해 치달을수록 사람들의 형편은 더 심각해진다고 예언은 경고한다. 더 아프고, 더 불행하고, 더 화를 낸다. 이럴 때도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어둠에 불을 밝히고 상처를 싸매고 성난 이들이 평화를 되찾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난 세상을 섬기기 위한 두 가지 관점을 제안해 본다. -편집실
성난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더 잘할 필요가 있다고 복음은 분명하게 말한다
굳이 구글이나 사전에서 분노의 정의를 찾을 필요가 없다. 분노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분노를 대면하면 우리는 불쾌하고 놀라고 적대한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한다.
분노는 긴장감으로 분위기를 꽉 채운다. ‘분위기 험악하네’라는 말은 화난 상황이 주는 으스스한 기분을 묘사한다.
개는 인간의 분노를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험악한 장면을 보면 개는 흔히 안전한 곳을 찾아서 머리와 허리를 숙이고 몰래 도망친다. 고양이도 그렇다. 고양이들은 흔히 생길 수 있는 발차기를 피해서 조용하게 몰래 도망친다.
그런데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 덫에 걸릴 때가 있다. 화난 사람들 주변에 있다가 무고한 피해를 당한다. 나는 이런 희생자들과 그들의 불행에 마음이 쓰인다. 이 세상에서 그런 덫에 걸려 마땅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분노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 분노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폭풍이 그들의 가슴, 머리, 손에 엄습해 돌풍과 천둥과 번개가 친다. 완전히 통제를 상실한다. 고요함이 거의 없는 그런 끊임없는 폭풍에 빠지는 일은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다. 이런 ‘우레의 아들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의 도화선은 짧고 폭발은 핵폭탄급이다.
분노는 생소한 인간 상태가 아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자부심 강한 가인이 희생 제물을 거절당했을 때와 같이 분노는 일찍부터 성경에 나타난다. 분노는 성경 전체를 관통해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 12:17)라는 인상적인 내용이 기록된 요한계시록까지 계속된다.
여러 세대를 거쳐 재림교인들은 “백성이 분노해 쌈 싸우니 주 예수 다시 오네”*라고 노래했다. 지구 온난화를 의심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 행성이 분노로 달궈졌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다툼 그 너머
루디야드 키플링이 아들에게 적어 준 글에서 배울 점이 있다. “만일 네가 모든 걸 잃었고 모두가 너를 비난할 때 너 자신이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있다면…너는 비로소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이 충고는 다음의 말씀과 비슷해 보인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너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여기 또 잘 알려진 구절이 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중 하나는 스스로 화내는 일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근심, 걱정, 슬픔에 있을 때 화를 낸다. 사람들에게 근심, 걱정, 슬픔이 있을 때가 바로 봉사해야 할 순간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화를 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까이하지 않는다. 화가 난 사람들은 분명 위험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분노한 가인의 손에 아벨이 죽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어 준다. 우리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궁극적인 확신을 지녀야 화를 낼 이유가 사라진다. 복음으로 우리의 시야가 영원까지 확장되면 눈앞의 짜증에도 우리는 그다지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와 의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불공평, 악행, 비행은 의분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의분은 바람직한 교정과 개혁의 촉매제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은 것은 악행과 비행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중세의 그 유명한 교회 내에 존재한 불평등, 악행, 비행에 반발해 예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경험하도록 성경과 진리를 전한 것이다.
비참하게도 불평등, 악행, 비행은 중세 시대에 그치지 않았다. 이런 악행은 전 세계에 걸쳐 지금도 여전하다. 늙어 가는 이 지구의 모든 불의를 바로잡고자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의 무능력에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보증이 있다. 온갖 불의를 세세히 아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권세 즉 의롭고 거룩한 권세를 지니고 다시 오신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두를 부활시키고 모두를 심판하고 모두를 위한 순전한 정의를 실행할 것이다. 번복할 수 없는 이 보증이야 말로 성난 이 세상이 우리에게서 들어야 할 것이다.
* 찬미가 203장 나팔을 들어서 크게 불라 5절
앤서니 켄트 대총회 목회부 부부장이다.
발문
복음으로 우리의 시야가 영원까지 확장되면 눈앞의 짜증에도 우리는 그다지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