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과 친절
빌 노트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독설은 갈색 편지 봉투에 담겨 도착하거나 노트북 컴퓨터의 이메일을 통해 스크린에 퍼진다.
“00 씨가 벌인 끔찍한 일을 아신다면 같은 재림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실 거예요. 그 사람의 죄에 대해 왜 언급하지 않는 것이죠? 아끼지 말고 크게 외쳐야죠.”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어떤 교사를 짐승에 비유해 비난하고 있다. “00 박사는 예의 바른 사람 같지만 그 속에는 으르렁거리는 용 한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의 어조는 일말의 부드러움도 허용하지 않는다. 죄는 지적받아 마땅하고 죄인은 부끄러움을 겪어야만 한다는 투다.
분노와 파괴의 시대 즉 권력자의 권력 남용이 비일비재하고, 힘없는 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울부짖는 시대라면 남은 교회에서도 목청이 높아지는 일이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의 사려 깊으면서도 예리한 의견 차이는 이제 상대방의 계획, 견해, 품성을 마구 찔러대는 “딱 걸렸어.”라는 고함 소리에 밀려나고 말았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흠잡고 헐뜯기 위한 말을 쏟아부을 때 우리는 반쯤은 무서움을 느끼고, 반쯤은 고소함을 느끼며 지켜본다. 이 모든 일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1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옳다면(분명히 그가 옳다고 나는 믿는다.) 예수님의 충성스런 제자들이 지닌 너그러운 마음과 주님의 재림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바울의 아리송한 공식을 헤아려 보자면, 신자들의 친절한 행동이란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증표이자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긴급한 필수 요건이다. 서로(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다루는 태도와 교회의 선교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따라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더 이상 예수의 친절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우리는 걱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교회의 본모습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우리가 추구한다고 하는 왕국을 지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위선을 비난한 예수님의 예를 들어서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사람은 성경을 정확히 읽지 못한 것이다. 엘렌 화잇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나는 중요한 차이점을 말해 주고 있다. “그분은 절대로 무례하지 않고 절대로 쓸데없이 심한 말을 하시지도 않았다. 예민한 영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신 적도 결코 없었다. 그분은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위선과 불신과 죄악을 용감하게 꾸짖으셨지만 통렬하게 책망하는 그분의 음성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2
예수님의 친절을 기념하고 강조하는 이번 달의 여러 기사를 읽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사랑으로 부드러워지고 여러분의 혀가 평화에 푹 잠기기를 기도하라.
“검으로도 큰 싸움으로도
요란한 북소리로도 아니겠네.
사랑 어린 친절한 행동으로
하늘나라는 임하겠네.”3
1 Charles Wesley, “Gentle Jesus, Meek and Mild,” The Seventh-day Adventist Hymnal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5), no. 540
2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353
3 Ernest W. Shurtleff, “Lead On, O King Eternal,” The Seventh-day Adventist Hymnal, no.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