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기본적인 특성이 지닌 힘의 재발견
제럴드 A. 클링바일
오늘날 우리는 ‘온유’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용어인 ‘양순’, ‘유순’ 같은 말을 자주 들을 수 없다.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힘, 능력이나 유능한 지도력을 내세우며 자신의 영역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공개적 담론에서는 그런 말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소셜 미디어를 포함해 긴장과 갈등이 넘쳐나는 매체들은 온유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교회 뉴스를 포함해 페이스북이나 뉴스 사이트 댓글을 검토하다 보면 온유함이 결핍된 사례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일은 심지어 동일 신앙 공동체의 일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 하면 떠오르는 비슷한 말은 친절, 다정, 온화 등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문화에서 ‘온유’는 종종 무력 또는 현실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무능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온유와 온유함에 대한 언급들은 우리에게 사뭇 다른 그림을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다음의 장면을 잠깐 상상해 보자. 키 크고 근육질인 소방관이 장비를 갖추고 큰불을 끄는 모습을 그려 보라. 그는 밝은 노란색 혹은 주황색의 두꺼운 방화복으로 위아래를 무장하고 있다. 특수 장갑을 낀 손은 거대하기조차 하다. 등에는 산소통을 메고, 머리에는 샛노란 헬멧을 썼다. 재와 먼지로 뒤덮인 그의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있다. 그 모습이 확대되면서 그의 손안에 보송보송한 작은 털 뭉치 같은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 소방관은 방금 불 속에서 작은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구해 낸 것이다. 그 사진은 곧바로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한다. 혼돈과 고통, 붕괴의 현장 속에서 온유, 동정 그리고 보살핌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온유란 연민이 가시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때로 미미하고 겉으로 중요하지 않게 보이지만. 성경은 ‘온유한 ○○’, ‘온유’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수없이 사용했다. 『성경 이미지 사전(Dictionary of Biblical Imagery)』에서 릴런드 라이킨은 잠언에는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온유의 놀라운 두 가지 그림”1이 있다고 말한다.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는 말씀은 잠언 15장 1절의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함께 언어의 힘에 대해 특별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온유와 온유한 말이 나약함이나 무력함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시편 18편 35절에서는 시편 기자를 위한,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온유하심에 대해 언급한다. 그 언어는 군대의 이미지(32, 34~35절)를 사용하지만 우리를 위대하게 해 주는 것은 무력(武力)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유임을 보여 준다. ‘온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겸손, 자제, 짐을 지는 것과 연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유와 은혜만이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는 분명한 역설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온유하신 동정과 보살핌만이 죄로 굳어진 마음에 와 닿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분노하나 온유하신 하나님
우리는 이런 역설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많은 설명 속에서 종종 발견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을 덮은 불꽃과 우레를 경험했고 땅을 흔드는 지진을 느꼈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 떨었다(출 19:16~20), 그 반면에 기가 꺾이고 실망한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은 “여린 소리”(공동번역) 또는 “미세한 음성”(한글킹제임스)을 선택하셨다(왕상 19:12). 성경에서 하나님은 용사이시지만(출 15:3; 사 42:13) 동시에 양 무리를 따스하게 돌보는 목자이시다(시 23편). 그분은 치료자(출 15:26; 신 7:15)이면서 재판관이기도 하시다(시 75:7; 사 66:16). 판사, 입법자, 왕으로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사 33:22).
위에 언급된 모든 은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특성이 하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들을 향한 흔들림 없는 사랑에 이끌리신다는 점이다(요일 4:8).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고, 자기 백성을 재판하시며, 그들에게 복이 되는 생명의 원칙(혹은 계명)을 주시고, 마침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사랑으로 하신다.
출애굽기 34장 6~7절은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는 구약 성경의 핵심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요한 순간을 보여 준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의 무서우면서도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볼 수도 있지만 이전의 많은 주석가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온유, 동정, 인자 그리고 긍휼이 그분의 공의에 앞서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성육신 속에서 온유를 보다
타락한 지구에 예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박자와 리듬에 속도가 붙었다. 신인이신 구주께서는 자신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마 11:29)하다고 즉 죄와 짐을 기꺼이 짊어질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무력한 아기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한 뒤 소박한 갈릴리 마을 나사렛에서 자라났다. 이런 모습은 당시 메시아에 대한 대중적인 기대와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온유, 동정, 다정함이 어떻게 한 사람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셨다. 후에 요한은 그분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는 분으로 묘사했다(계 5:12). “온유는 현 세계의 권력 구조를 무효화시키는 최고의 체제 전복 능력자 하나님의 모습이다.”라는 라이킨의 지적이 적절하다.2
예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대하는 과정에서 그분의 동정과 온유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리를 보면서 그분은 넘치는 동정으로 병자를 치료하고(마 14:14) 굶주린 자를 먹이셨다(마 15:32~39).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으키기 전에 그분은 먼저 그 아이의 손을 잡으셨고(막 5:41), 죽은 외아들을 살리기 전에 슬퍼하는 과부에게는 “울지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눅 7:13, 14~17).
“구주께서는 집집을 찾아가 병자를 고치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덜어 주고, 근심하는 사람에게 평안을 말씀하셨다.”라고 엘렌 화잇은 기록한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자기 팔로 안으시고 피로한 어머니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분은 끊임없는 친절과 온유로 갖가지 인간의 재난과 고통에 대처하셨다.”3
온유는 종종 접촉으로 전달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할 때 많은 사람과 접촉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언어적 소통은 예수님의 부드러운 접촉을 받았던 청각장애인들과 언어장애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막 7:31~36). 마찬가지로 한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느끼고 시력을 되찾았다(막 8:22~26).
온유하게 살라는 부르심
온유에 대한 언급은 신약 성경에 거듭 나타난다. 광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은 온유를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오지 않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나열했다(갈 5:23).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곳에서만 자라고 풍성해질 수 있다. 바울은 또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골로새 교회에 조언했다(골 3:12). 그는 종종 자신의 편지에서 언급한 교회들을 부드럽게 다루었다고 강조했다(고전 4:21; 살전 2:7). 이 본문들에 제시된 태도들은 예수께서 산상 설교에서 강조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치와 태도를 오늘날 세상의 문화가 환호하는 능력 있고 성공적인 인물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문화 역행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온유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떻게 더 온유하고, 더 동정심이 많고, 더 친절하며, 더 배려하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이상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져 있다고 인지하는 것이다.
겸손은 온유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자신을 낮추면 자신은 더 적게,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업적이나 역량에 두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받아 주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만을 그 단단한 기반으로 삼는다. 온유하신 치료자에게 받은 은혜는 주변 사람에게 전할 때 기적적으로 늘어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볼 수 있는 특성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자기에게 더 가까이 이끌기 위해 우리의 삶에 시련과 도전을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무한하신 위로를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거울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가 고민할 때 그분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분은 큰 소리로 외치신다. 고난은 듣지 못하는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메가폰이다.”라고 기독교 작가 C. S. 루이스는 진술했다.4 하나님의 원수가 일으키는 고통과 잔혹함에 혼란을 느낄 수도 있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맹렬히 비난하고 싶은 유혹이 들 수도 있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이신데도 우리는 종종 우리의 관심을 사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관점을 제시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면, 이것은 여러분을 위로하고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다면, 그것도 여러분을 위로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로로 여러분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동일한 고난을 받을 때에 오래 참습니다”(고후 1:6, 쉬운성경). 하나님의 부드러운 위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주변의 다른 이들을 위로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온유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 함께 감춰진 삶을 보여 주는 특성일 것이다. 온유는 연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선한 목자를 따르는 착하고 온유한 자들이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명해 준다. 그들은 사랑받고 있으며, 이기적인 권력 구조에 매달리기보다 온유로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지식 안에서 안전하다. 목소리 큰 사람, 자신만만한 사람 혹은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이 지금 보아서는 계속 잘나갈 것 같지만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 5:5).
1 Leland Ryken et al., Dictionary of Biblical Imager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p. 325
2 앞의 책
3 엘렌 G. 화잇, 『사도행적』, 364
4 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New York: HarperCollins, 1996), p. 91
제럴드 A. 클링바일 『애드벤티스트 월드』 부편집장이다.
사이드바
나는 얼마나 온유한가?
개인적인 평가 체크리스트
다음의 질문들은 과학적인 조사를 반영한 것은 아니지만 더 의식적으로 온유를 실천하도록 또 하나님 나라의 이 중요한 가치를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직하게 평가하도록 해 준다. 각 항목에 1~10점으로 점수를 매겨 보고 자신의 점수를 높일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도 찾아보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와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겸손과 자제를 계발해 왔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내 시간이나 에너지를 침범할 때 짜증을 내고 반발적인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거나 반응할 때 그들의 약점과 한계를 고려하는가?
내 성격의 한계와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가?
나를 불쾌하게 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iblp.org.에서 찾은 Christian Institute of Basic Life Principles의 자료를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