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복음은 모든 반대를 이겨 낸다
둘째 천사의 기별
요한계시록에서 악한 세력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것을 모방하는 듯이 보인다.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세 천사가 있고(계 14:6~12) 용에게는 어린양과 마지막 대결을 벌이기 위해 온 천하의 왕들을 모으는 귀신의 영 셋이 있다(계 16:13~14). 둘째 천사의 기별도 이런 사상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도성이 있고, 용도 자신의 도성 바벨론을 만든다. 바벨론은 영원한 복음의 모조품인 가짜 기별을 인간에게 선포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기별은 무너질 것이다.
바벨론과 어린양
둘째 천사는 복된 소식을 선포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계 14:8). 계속해서 이 기별의 주요 사항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바벨론과 타락한 그룹 천사
이 모든 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일컫는 바벨론의 또 다른 이름인 “시날 평지”(창 11:2)에서 시작했다. 대홍수 이후에 인간은 바벨이라는 성읍을 지어 그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다(4절). 이 기사에서 ‘바벨’이라는 명사는 ‘뒤섞는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동사 ‘바랄(balal)’에서 왔다. 바벨은 ‘혼잡’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 가지 공동 목표 아래 인간을 연합시키려는 계획에 관한 이야기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염려에서 비롯한 인간의 행위와 성취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의 야망에 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땅과 하늘 즉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존재의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인 인간적 영역과 신적 영역을 통합하여 하나님 없이 독자적으로 세우겠다는 우주적 야망이다. 바벨론 사람들은 이 도시를 ‘밥-일라니(bab-ilani)’ 즉 ‘신들의 문’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 도시가 땅의 인간과 하늘의 신들을 통합하는 우주적 도시로 가시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이 이야기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하는 반역 행위에 관한 것이다(창 9:7; 11:4). 그런데 초대받지 않은 하나님이 개입하여 인간 언어의 통일성을 뒤집어 놓으시는 바람에 그 건설 프로젝트와 목적은 좌절되고 말았다(창 11:7~8).
바벨론의 교만과 자만심은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바벨론에 심판을 선언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사 14:3~23). 이 구절에서는 바벨론 왕의 야심과 계획을 타락한 그룹 천사의 가장 깊은 야망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룹 천사의 내적 타락을 드러내신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13~14절). 똑같은 야망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마음에도 자리 잡은 것이다. 역사적인 바벨론은 멸망했지만 그룹 천사의 야망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그는 마지막 때에 그 야망을 다시 이루려 할 것이다.
마지막 때의 바벨론과 타락한 그룹 천사
고대 도시 바벨론의 본질과 목적이 이제 마지막 때 바벨론의 모형으로 활용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첫째, 불결한 삼위일체이다. 그것은 타락한 그룹 천사의 계획을 추진하려고 결합한 세 가지 세력으로 구성된다(계 16:13). 그 셋은 하나님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용(계 13:2, 4), 그리스도를 주로 모방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계 1:8; 13:14), 거짓 선지자로 불리며 성령의 사역을 모방한 땅에서 나온 짐승이다(계 13:13; 19:20). 종말론적 예언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중세 교회, 땅에서 나온 짐승은 미국 개신교, 용은 영혼 불멸이라는 이교 사상에 기초한 강신술이며 사탄은 이들을 통해 기만적인 기적을 행할 것이다(계 16:13~14).
둘째, 바벨론은 이 지구상에 있는 배도한 기독교의 종말론적 절정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문을 열고 돌이키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다(계 3:14~22). 바벨론은 부유하고(계 18:3, 11~13) 아름다운 옷을 가지고 있기에(16, 19절)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부와 의복 다시 말해서 복음의 풍성함(계 3:18)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바벨론을 구성하는 짐승들이란 현대 사회를 사회적‧경제적으로 억압하는 괴수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을 적대시하는 기독교가 드러낸 배신적 표현이다(계 13:15).
셋째, 바벨론은 거짓 구원의 기별을 가지고 세상에 다가간다. 바벨론은 “모든 나라를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이다(계 14:8). 바벨론을 움직이는 힘은 욕정과 욕망이며 성령으로 감화된 마음이 아니다. 영적 음녀의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바벨론은 신실하지 않은 아내임이 드러난다. 이것은 주님께 신실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열방과 동맹을 맺는 것(겔 16:26~29) 그리고 다른 나라의 종교적 관습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렘 2:20~21; 겔 6:9; 16, 23장). 이 두 가지 모두가 배도의 표현이다(시 106:35~39).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땅의 왕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며(계 17:12~13) 용의 기만과 숭배를 지원해 준다(계 13:4).
넷째, 마지막 때 바벨론을 세우는 과정에서 용은 배도한 기독교의 신념을 중심으로 비기독교 세계를 통합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이 세상은 수많은 세계 종교, 적대적인 정치 세력, 모순적인 사고방식 심지어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가득하므로 그것을 통합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다. 용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초자연적 현상을 사용하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초자연적인 경험보다 인간의 충성심을 바꾸는 데 더 효과적인 것은 별로 없다. 요한계시록은 용과 그의 대리자들이 수행할 놀라운 기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기적의 결과로 세상의 사회적·정치적·종교적 판도에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계 13:13~14).
어린양의 승리
바벨론이 구체적으로 세상에 제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벨론은 거짓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자기만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린양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제안하시지만 바벨론은 자기의 포도주를 제공한다. 포도주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상징할 때가 많았다. 바벨론은 자기 추종자들에게 바벨론의 ‘은혜로운 구원’ 즉 자기의 영적 부도덕을 제공한다. 구약에서 포도주는 ‘붉은 술’(예, 신 32:14)로 불리며 예수님의 피와 생명을 상징한다. 주님은 자신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셨다. 그것은 죄 용서를 위해 바친 자신의 생명(마 26:28) 즉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을 상징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죄인을 위한 유일한 생명의 근원으로 자신의 피를 제공하셨다(요 6:53~54; 19:34). 바벨론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포도주를 줌으로써 용과 그의 대리자들이 행한 놀라운 기적으로 입증되었다는 거짓 복음을 전하고 있다(계 13:13~14; 16:13~14). 이 거짓 복음은 “포도주” 즉 “그의 음행[배반적인 가르침]”이라고 불린다(계 14:8). 그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변질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영적 불충실과 부도덕이다.
인류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과 용(타락한 그룹 천사)을 통한 거짓 구원의 복음 간의 대결로 양극화될 것이다. 그 최종적 결과는 바벨론의 붕괴이다. 이 멸망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 번째는 아직도 진행 중인 영적인 것이다. 교회 역사 초기에 시작된 배도가 변절한 기독교의 통합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 붕괴가 발생할 것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아직 바벨론의 잔이 완전히 차지 않았다. 두 번째 붕괴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것이며 바벨론의 마지막 패배로 이어질 것이다. 요한은 그때 “큰 성[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리라고 말한다(계 16:19). 그 가증한 삼위일체는 어린양 앞에서 연합하여 설 수 없을 것이다(참조 창 11:8).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그들을 이기실”(계 17:14) 것이다. 악인들은 그 어린양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할 것이다(계 6:16). 사자의 공격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희생적인 모습과 사역으로 [가증한 삼위일체를] 물리친 것이다. 그 어린양은 복음을 구현하고 그 쟁투에서 승리를 거두신다.
결론
바벨론은 아직 그 존재를 세상에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배도의 과정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시작했고 그리스도가 오시기 직전에 절정에 이를 것이다(살후 2:1~10). 우리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특히 비기독교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세계 일부 지역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얼마나 증가하고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특히 종교적인 부분에서 더 중대한 변화가 예상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선포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예언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로마의 권세와 교황권에 관련해 어떤 부분에서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아 기록한 내용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엘렌 G. 화잇, 『Counsels to Writers and Editors(저자와 편집자에게 보내는 권면)』, 65
묵상을 위한 질문
1.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바벨론적’ 사고방식을 없앨 수 있을까?
2.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어째서 복된 소식이 되는가?
3.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삼위일체를 모방한 ‘가짜’ 삼위일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가증한 삼위일체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