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창조주를 경배하라
첫째 천사의 기별에 담긴 영원한 복음
첫째 천사가 선포한 하늘의 기별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며, 모든 사람에게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경배하라고 긴급하게 호소한다(계 14:7). 예배는 우리를 우주적 쟁투의 핵심으로 이끌며 타락한 그룹 천사(참조 마 4:9)가 아니라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촉구한다. 타락한 마귀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권한을 빼앗기로 작정했다. 대쟁투에서 예배는 최종적인 시험대이다.
예배-어린양에 대한 충성의 표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서 ‘경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프로스쿠네오’는 문자적으로 ‘절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경의를 표하는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동사의 대상이 하나님일 때는 우리 존재의 온전함, 삶의 중심과 목표를 그분 안에서 찾고자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내려놓겠다는 표현으로 몸과 마음을 깊이 숙이는 행동을 뜻한다. 예배는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예배는 믿음의 고백이다
하늘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계 4:11)라고 선포한다. 그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고백하며 자신들과 함께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한다. 경배 행위는 사실상 ‘나의’ 창조주로 선언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이 믿음의 고백이란 성령을 통해 우리의 내면에 깊이 그 뿌리가 박혀 있다가 말과 행동을 통해 표출되는 절대적인 복종의 엎드림이다(참조 롬 10:9~10). 사실 창조주를 경배한다는 것은 생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분이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예배란 집에 거하는 것이다. 사랑의 창조 사역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 앞에 우리가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살아 있는 사람만이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시 115:17~18). 창조받은 생명은 생명이신 그분을 보면서 감사와 사랑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된다.
요한은 또한 하늘의 존재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어린양이]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라고 선포하는 모습을 보았다. 예배란 구속주로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이다(요 3:7; 고후 5:17). 구속에는 하나님의 본래 창조 세계가 타락한 그룹 천사에 의해 훼손당하고 인류가 본향에서 쫓겨났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이후 하나님의 아들은 이기적인 피조물들의 행성에 내려오셔서 그들을 집으로(참조 사 53:6), 생명의 원천이신 분에게로 다시 데려가고자 하셨다. 잃었다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다시 회복된 생명은 감사의 예배로 그분 앞에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굽히며 그분을 우리의 구속주시라고 우주 앞에서 고백한다.
충성의 고백
예배는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 쟁투에서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행위이다. 다니엘(단 6:10)과 그의 세 친구(단 3:16~18)처럼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은 용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피조물은 그 스스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으므로 어떤 작은 생명이라도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그룹 천사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 그를 경배하는 것은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백성은 “성도들의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계 14:12)을 지키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속주로 경배한다는 것은 삶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일을 인내함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계명은 우선적으로 십계명이다(출 20:1~17).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부르심은 첫 번째 계명에 순종하라는 초청이다(계 14:7).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말라는 경고는 우리에게 두 번째 계명을 지키라는 요청이다(9절).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짐승을 정죄한다는 것은 세 번째 계명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계 13:6).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계 14:7)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은 네 번째 계명(출 20:11)에 나오는 언어와 개념을 사용하여 누구를 경배할지에 대한 질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만일 인류가 오늘날까지 안식일을 지켜 왔을 것 같으면 그들의 생각과 애정이 창조주께 집중되어 주님께서는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되셨을 것이며 우상 숭배자, 무신론자, 회의론자가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1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기념하는 날이다. 따라서 이 기념일을 용이 영원히 없애 버리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안식일 문제가 온 세상이 다 가담하게 될 대쟁투의 핵심 쟁점이 될 것”2인지를 설명해 준다. 오늘날 안식일 계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최소한 두 가지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성경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무시하고 일요일 준수를 주장하는 배도한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는 자연 과학 연구 분야에서 나타난다. 자연 진화론은 많은 과학자와 다른 여러 학자의 양심에서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제거해 버렸고, 창조주를 기념하는 안식일을 무시해 왔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작위적이고 목적 없는 자연적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창조주는 없으며 그런 분이 필요하지도 않다. 자연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을 융합하려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투쟁, 고통, 생존, 죽음이 포함된 기나긴 진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를 수행하셨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사랑 많으신 성경적 하나님과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첫째 천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삶과 죽음의 문제다.
결론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근본적인 쟁점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누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자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어린양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분만이 생명을 창조하시며 또한 구속을 통해 재창조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할 때 진정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1 『각 시대의 대쟁투』, 438
2 『엘렌 G. 화잇의 주석』, 계 14:9~12
묵상을 위한 질문
1. 오늘 낭독문에 나와 있는 “경배라는 행위란 본질적으로…믿음의 고백이다.”라는 구절을 생각해 보라. 우리의 예배에 대해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2. 왜 예배와 창조의 연관성을 깨달아야만 하는가?
3. 진화론을 믿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창의적이고 흥미롭게 첫째 천사의 기별을 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