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하나님의 사랑 어린 경고
셋째 천사의 기별
주님께서는 영원한 복음의 선포 즉 자신에게로 돌아오라는 호소를 통해(첫째 천사의 기별) 그리고 바벨론의 거짓 복음에 대하여 경고하심으로써(둘째 천사의 기별) 죄에 빠진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마음을 여신다. 그분은 용의 편을 택하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인류에게 경고하시며, 그들이 어린양에게 귀 기울이고 충성하기를 바라신다. 이 기별은 마지막 심판과 어린양을 통한 우주적 대쟁투의 결말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계 14:9~11)에 사용된 언어와 이미지들이 기독교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린양의 희생적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그 기별에 담긴 의도가 제대로 드러난다.
충성심
셋째 천사의 기별은 인간이 맞닥뜨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느냐이다. 쟁투는 벌어졌고 우리의 개입 여부에 상관없이 우리는 반드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린양이냐 타락한 그룹 천사냐 둘 중 한 가지 선택 사항만 있을 뿐이다. 나 자신에서 충실하면 된다는 따위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싸움에서 나타나는 충성의 개념은 심오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성하는 대상의 정체성이 우리의 품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짐승의 이름과 표를 받는다는 표현에 담겨 있는 뜻이다(계 14:9, 11). 타락한 그룹 천사에게 충성하면 그 흔적이 삶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짐승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타락한 그룹 천사의 의도와 야망과 하나가 되었고 그의 소유가 되었음을 뜻한다. 짐승의 표에서는 소속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손과 이마에 있는 충성의 표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으며 그 당사자가 타락한 그룹 천사에게 속했음을 사람들은 확인할 수 있다(출 13:9). 표는 우리가 충성하는 대상의 권위를 상징한다.
기독교 변절의 역사에서 충성심을 요구하는 권위의 상징으로 무엇이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본다면 단연 그것은 일요일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만큼 심각한 것은 없다. 제칠일 안식일을 쉼과 예배의 날로 정한 하나님의 권위가 토요일을 일요일로 바꿔 버린 인간의 목소리에 의해 묵살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마지막 대쟁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한계시록 14장 9절에서 경배와 짐승의 표 사이의 연관성을 주목하자. “누구든지 짐승에게 경배하고…그 표를 받으면.” 이 두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일요일을 예배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곧 예배 행위이다. 두 계명 곧 첫째와 넷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일요일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안식일의 짝퉁이다.
포도주와 불
악인의 마지막 운명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어려운 주제라고 말하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게 된다. 요한은 포도주 비유와 불과 유황의 비유로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이미지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는 데 사용됐다(렘 25:15~28; 시 11:6; 창 19:24). 하나님의 진노는 문자 그대로 잔을 가지고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언어들은 상징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악인이 마시게 될 포도주의 종류이다. 대조적인 핵심 사항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도주는 (평소처럼) 물을 섞지 않았고 향료를 사용하여 독성을 더 강하게 했다(계 14:10). 악인들은 자비로 희석되지 않은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할 것이다. 더 이상 회개할 여지는 없다(계 22:11).
두 번째 비유는 불과 유황이다. 악인은 불과 유황 혹은 ‘불타는 유황’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은유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험을 불타는 유황이 우리 몸에 닿을 때 느끼는 고통에 빗댄다. 하나님의 진노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이 은유는 또한 불에 의해 파괴된 것은 복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그렇게 된 것은 영원히 파괴된다. 하나님의 진노로 둘째 사망이라는 악인의 최종적 멸망이 일어난다는 개념이다(계 20:6, 14).
그 불은 그것에 의해 타는 것이 영원히 소멸된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그 불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타오른다(사 34:9~10; 유 1:7). 악인들이 둘째 사망을 당하는 과정에는 쉼이 없다.
그리스도의 고통
악인들의 고통스러운 최종적 죽음은 아직 아무도 겪어 보지 않았기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유일한 예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그 마지막 죽음으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해 그것을 겪으셨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에서 그 누구도 둘째 사망을 겪을 필요는 없다. 적어도 둘째 사망이 있어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최후의 심판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심판과 연결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세상에 내릴 심판을 짊어지셨다(요 12:31). 희생 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지셨다(요 1:29). 자신을 구주로 믿는 자에게 멸망이 아니라 기쁨과 영생을 주고자(요 3:16) 그분은 죄에 빠진 인간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잔을 마셔 버렸다(요 18:11). 십자가에서 그분은 불 침례를 경험하셨고 “내가 목마르다”(요 19:28)라고 말씀하셨다. 삼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함께 고난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려고 아들과 더불어 신성만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을 겪으셨다.”* 그가 느낀 극심한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일 뿐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분리되었음을 느끼는 내적 고통이었다(마 27:46). 악인들은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것임을 깨닫고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을 것이다.
결론
대쟁투는 실제로 충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직면하게 될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는 위협적으로 들린다. 숨김없는 하나님은 마음의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신다. 자신의 피조물이 아무도 죽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 언어는 치명적인 위험이 앞에 있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경고의 표지판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경험했기에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신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절단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어린양을 선택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
*엘렌 G. 화잇, 『God’s Amazing Grace(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61
묵상을 위한 질문
1. 왜 성경은 악인과 악인의 멸망에 대해 그토록 생생하게 초점을 맞추는가?
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심판을 이해하는 데 어떤 점에서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을 화난 분으로 생각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보여 줄 수 있을까?
3. 구원의 계획이라는 맥락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장 바람직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