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의 지존과 음모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모론’이라는 용어는 그렇게 흔히 언급되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날은 뉴스 진행자나 동네 사람들까지도 갖가지 음모론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고 있는 듯하다. 훨씬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음모론’의 무기화 즉 ‘그들(그들이 누구든지 간에)’이 ‘음모론’을 떠받들거나 부추긴다는 점이다. 음모론이 대세를 이루고 무기처럼 사용되는 이러한 추세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년 전에 나는 ‘예수와 음모론’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다. 선한 의도를 지닌 어느 성도가 어두운 음모를 폭로하는 엄청난 양의 DVD를 다급한 마음으로 나에게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유튜브가 없던 시절이다.). 그에 대해 설교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주제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200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음모론들은 확고한 성경적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설교는 항상 호평을 받았고 냉철하고 슬기롭게 판단하는 이들이 더 많았던 듯싶다. 그러나 현대의 가파른 변화에 미루어 볼 때 2000년대 초반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 이후로 음모론은 변형되고 증가해 왔다.
음모론의 과거와 현재
오늘날에는 ‘사방팔방’이 음모론투성이다. 누군가를 즉시 해고하고 심지어 신용을 떨어뜨리고 싶은가? 간단하다. 그들을 음모론자라고 부르면 그만이다. 그만큼 쉽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존 F. 케네디를 죽였는가?’, ‘9·11 테러는 내부의 소행이었나?’, ‘나사(NASA)가 달 착륙을 위장했는가?’와 같은 음모론들이 주로 회자되었다. 오늘날에 비하면 그때는 거의 평화 시대에 가깝다. 2021년에는 정치적·사회적·의료적·재정적 상황마다 음모론이 존재하는 것 같다. 코로나19와 백신에서부터 빌 게이츠, 제프 베조스와 같은 억만장자, 지정학적 동맹, 평평한 지구, 미국 대통령 선거, 날씨를 통제하는 정부, 큐어난(QAnon,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미국 극우 음모론 집단), 비행기 ‘컴드레일(화학 물질이나 생물 농약으로 뒤덮인 제트기 비행운)’, UFO 등 모든 것에 음모론이 넘쳐난다.
인터넷은 변두리 사상을 사람과 연결하고 사람과 변두리 사상을 연결하여 음모론의 확산을 위한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이것은 ‘음모론 신봉(trutherism)’으로 알려진 현상을 일으켰다. 음모론 신봉이란 거대하고 조직적인 음모에 의해 특정한 진실들이 대중에게 은폐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걱정스럽게도 이것은 초대 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던 1세기 영지주의와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가담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무지한 대중은 그렇지 못하다. ‘훤히 알고자(영지주의자들의 용어)’ 하는 열망은 부인할 수 없는 또 누군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주류파 사람은 대개 음모론 신봉자를 무시하고 음모론 신봉자는 주류파 사람을 무시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범주는 주제나 상황에 따라 쉽게 흐려지고 바뀔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음모론이 너무 많아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흥미를 끄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음모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양극화와 파벌이 만연한다.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종족 중심주의는 예외가 아니라 통례가 되었다.
예수와 음모론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지상에 계실 때 음모에 둘러싸였다.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진짜 음모였다. 적어도 네 가지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했다. 종교적 전통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로마에 의해 지위를 얻고 특권을 누리는 지배 계층인 제사장 계급이었다. 또 현대주의자인 사두개인들과는 이념적인 적이었다. 그러나 외인이었던 예수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들은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죽음을 모의하고 계획했다(요 11:45~57; 마 12:14; 26:3~5; 27:1~2).
2. 헤롯과 헤롯당은 예수가 죽기를 바랐고 바리새인들과 함께 그분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사두개인들과 마찬가지로 헤롯당도 바리새인들과 동맹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 유대 정당은 침례 요한을 참수한 통치자인 헤롯 안디바의 통치를 선호했다(마 14:1~12). 헤롯당은 복음서에 세 번 언급되었고(마 22:16; 막 3:6; 12:13) 매번 예수를 속이고 함정에 빠뜨리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소개된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막 3:6).
3. 가룟 유다가 예수를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려고 음모를 꾸몄다. 예수에 대해 외부의 적대 세력만 음모를 꾸민 게 아니다. 그분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음모를 꾸며 그분을 적들에게 팔아넘겼다(눅 22:4~6). J. B. 필립스 번역본 누가복음 22장 3절은 특히 소름이 돋는다. “그때 악마 같은 계획이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악마 같은 계획’이 다름 아닌 음모이다. 예수님의 측근 중 한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음모를 꾸몄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다.
4. 모든 배후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음모의 배후에 있는 이 음모는 인간을 넘어서고 현실을 넘어선 것이었다. 하나님의 고위 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에 반역을 일으켰다. 이 반역은 수많은 성경 구절에 나타나 있다(창 3장; 사 14:12~17; 겔 28:12~19; 욥 1~2장; 마 4:1~11; 눅 10:18; 요 12:31~32; 계 12장). 이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에서 발견되는 대쟁투의 주제의 배경을 이룬다. 루시퍼의 반역에서 최초의 음모가 비롯되었고 예수께서는 이 음모를 물리치고자 오셨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에 대한 이 사탄의 음모가 음모의 ‘본좌’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음모들은 진짜 음모이든 음모라는 추정이나 상상에 불과하든 다 피라미 음모들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노력을 좌절시키고자 애쓰는 사악한 세력을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잔인한 음모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누가복음 13장에서 놀라운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진짜 음모이든 음모론에 불과하든 악하고 교묘한 음모에 대해 예수님이 대응하신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가복음 13장은 불길한 어조로 시작한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눅 13:1). 이 참혹한 구절에서는 악명 높은 로마 총독이며 유대인을 싫어하는 본디오 빌라도가 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던 유대인 순례자들을 죽였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명백하게 그들의 피는 성소 희생 제물의 피와 섞였다. 이 끔찍한 장면은 유대인 누구에게나 완전히 실망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언급하신 점으로 미루어 그 사건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속보’일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로마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독실하게 사는 유대인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의 불길한 시작에 이어 31절에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곧 그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눅 13:31). 유대인이었지만 헤롯은 갈릴리와 주변 지역을 다스리는 속국 통치자로서 로마의 권력을 휘둘렀다. 13장 첫 부분의 잔인한 빌라도처럼 파렴치한 헤롯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정치적인 적수들과 지나치게 독실한 유대인 또는 메시아가 되려는 사람들을 기꺼이 제거했다. 헤롯의 아버지였던 헤롯 대왕이 한때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유대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던 점을 기억하라(마 2:16~18). 분명 헤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바리새인들의 경고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완벽 그 자체였다. 놀라울 정도로 용감했고 흥미로운 사실을 심오하게 보여 주셨다.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그 여우에게 말하여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칠 것이다. 그리고 삼 일째 되는 날에 내 일을 이룰 것이다’”(눅 13:32, 쉬운성경). 무자비하고 부패한 정부의 음모적 폭력이 담긴 뻔히 드러난 위협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일축(一蹴)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청난 교훈을 준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다.’ 예수님의 대답은 33절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한다”(쉬운).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각 구절은 비록 짧지만 예수께서 음모적 위협에 어떻게 응대하시는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가서 그 여우에게 말하여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헤롯이 말한 위협과 의도를 ‘알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신다. 이것은 탁월한 예수님의 모습이다. 예수께서 여우의 형상을 사용하신 것은 그분이 교묘하고 잔인한 헤롯의 명성을 알고 계시지만 다른 핵심 구절에서 보여 주듯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내 일을 이룰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구애받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태양이 구름 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이 솟아오르듯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은 헤롯의 음모를 초월한다. 예수님은 일하시는 중이고 헤롯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유사한 말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다고 해서’가 있다. 예수님의 집중된 일축이 여기에서 분명히 보인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심부름꾼들, 자신의 제자들, 늘 몰려오던 군중의 예상과 달리 두려움으로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일축하셨다.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예수님의 자칭 적들이 오목을 두고 있다면 예수님은 바둑을 두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수준에 계신다. 그분의 정체성과 사명은 자신을 둘러싼 매우 긴급하고 위험한 음모를 완전히 초월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간단하지만 최고의 대답으로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님처럼’이 답이다.
예수께서는 음모의 본좌와 피라미 음모들의 차이를 아셨다. 늘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신을 둘러싼 음모론들을 인지하고 계셨을까? 물론이다. 그런데 그러한 음모론에 압도되셨는가? 완전 그 반대였다. 우리가 주목하여 보았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한없이 중요한 사명 그리고 정체성과 비교했을 때 덜 중요한 것을 근본적으로 일축하셨다.
바리새인들과 나눈 또 다른 대화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더 많은 통찰을 준다. “너희가 인자를 들어 올리는 그때에야 너희는 내가 그인 줄 알게 되리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나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들을 말하노라.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나를 홀로 남겨 두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내가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요 8:28~29, 한글킹제임스). 예수님은 매우 구체적인 사명을 수행하고 계셨다. 그분은 흐트러짐 없이 예배드리고 충성하며 사셨고 언제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일들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한결같은 모본이 되신다.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의 일부 음모는 사실일까?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다른 것들은 비현실적이고 순전히 추측일 뿐 궁극적으로 사실이 아닌가? 확실히 아니다. 위 질문에 대한 답 중 어느 것도 성경에 정통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세상은 무너지고 있다. 부패, 탐욕, 불의는 예외가 아니라 통례가 되고 있다.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한 말이다.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 3:13, 한글킹제임스).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와 달리 군사적·재정적·사회적·제도적 권력이 소수의 손에 의해 통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한 시대이다 보니 음모론과 부정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회심하지 않은 파렴치한 사람들이 권력과 통제를 갈망하는 현실에 우리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불법, 부도덕, 기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빛을 밝히고 구원하려고 오신 세상이기도 하다.
악은 실재하지만 의와 은혜, 자비도 실재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통치라는 흔들리지 않는 기초 위에 지어진 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이며 하늘 왕국의 지상 시민으로 부름을 받았다(요 17:11, 14~16).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종종 온 마음을 사로잡는 ‘피라미 음모들’의 유혹에 대항하고 예수께서 그랬듯이 ‘음모의 본좌’에 대응해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가다듬도록 부름 받았다. 루시퍼는 하늘의 법정에서 잔인한 음모를 꾸며 하나님과 그분의 정부가 지닌 사랑과 정의를 비방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전쟁에 승리하도록 “일을 꾸미셨다.”
결론
요약하면서 여러분이 마주하게 될 음모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조언을 소개한다.
1.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지를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정체성과 사명에 초점을 맞추며 살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 땅에 있는지를 아셨다(눅 19:10; 마 20:28).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에 얼마나 집중적이고 헌신적이었기에 30세의 나이에도 다음과 같이 말씀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내가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으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했나이다”(요 17:4, 한글킹제임스).
2. 큰 그림을 유지하라. 일부 음모는 단순한 이론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성경을 믿는 우리의 주된 초점은 선과 악 사이의 근본적 음모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몰두해야 할 유일한 음모이다.
3. 증명할 수 없는 주장에 대한 집착과 끝없는 추측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미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교회의 예언적 소명과 메시지를 기억하라.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배운 학생으로서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그 문제들이 무엇인지 아는 특권을 누렸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을 단단히 붙들라.
4. 전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복음적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경이로움, 아름다움 그리고 의로움으로 마음과 영혼을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위에 열거한 네 가지 요점을 엘렌 화잇은 다음의 진술로 잘 요약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한 의미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이 세상을 위한 파수꾼과 빛을 가진 자로 정해져 있다. 그들에게 파멸해 가는 세상에 전해야 할 마지막 경고의 기별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빛이 그들에게서 비치고 있다. 그들은 첫째, 둘째,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가장 엄숙하고 중대한 사업을 맡았다. 그보다 더욱 중대한 사업은 없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데이비드 애셔릭 ‘라이트 베어러스’의 강연자이며 훈련 및 제자훈련 사역인 ‘어라이스’의 공동 설립자이다. 아내 비올레타, 두 아들과 함께 배낭 여행, 등산, 플라이낚시, 조류 탐사, 사진을 즐긴다. 미국 콜로라도에 살고 있다.
*『복음전도』, 119
발문
예수께서는 음모의 본좌와 피라미 음모들의 차이를 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