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하는 강아지
주는 것은 단지 행동이 아니라
태도이다
우리 집 개 몰리는 귀엽지만 잘 흥분하는 흰색의 웨스트 하이랜드 테리어이다. 그 개는 거래하는 기술을 배웠다. 몰리는 짖는 대신에 흥정하는 법을 이미 터득했다. 거래는 이같이 진행된다. 몰리는 아내의 신발 한 짝을 물고 도망친다. 새것일수록, 멋진 것일수록 좋아한다. 다시 가져다 놓으라고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다. 사실 몰리는 쫓고 쫓기는 그 일을 재미있어 한다. 몰리는 최고 속도로 가구들 사이를 급히 빠져나가서 불법으로 확보한 물건을 가지고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린다. 몰리는 신발을 씹으며 추격의 긴장감을 낙으로 삼는다. 그런 몰리가 우리와 흥정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소리 나는 장난감이나 좋아할 만한 맛난 먹이를 가져오면 몰리는 신발과 그 물건을 거래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거래가 가능하다고 말해 주는 성경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이것이 바로 그 성경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신실하게 드리는 각 사람에게 성공과 번영을 보장하셨다. 그들은 이 구절을 거래 시스템처럼 대한다. 하나님에게 10퍼센트를 드리면 그분은 풍성히 복을 주신다. 그들은 그것을 보상처럼 대한다. 하나님이 빚을 진 셈이다. 우리는 거래가 잘 이루어지기에 십일조를 드리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을 졌는가?
복이 먼저이다
선지자 하박국은 유명한 몇몇 목사가 요즘 신봉하는 번영 복음과는 다른 기쁨을 가르쳤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봉사는 영적 보상보다 나은 무언가에 근거해야 한다는 요점을 그는 말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 얻는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거래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번영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분이 우리의 구주이시기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린다. 우리는 그분에게 은혜를 받는 수혜자이다. 그리고 감사 가운데 우리는 만물이 그분에게 속했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청지기 직분 안에서 그것들을 간수할 뿐이다.
하나님의 십일조와 자원하는 헌물을 드리는 일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부유하지 않으며 가장 큰 집과 최신형 자동차를 가질 만큼 모든 이웃보다 잘나가지도 않으며 재산이 특별히 많지도 않다. 그들은 신실하지만 세상보다 앞서가는 듯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 주기를 잊지 않으셨다. 시인이 약속한 바와 같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결식함을 보지 못했도다”(시 37:25).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충실함에 따르는 복을 약속하셨다 해도 본질적으로는 복이 먼저 이르는 것이며 우리가 돌려드리는 십일조는 이미 받은 복을 인정하는 표시이다. 하나님의 십일조를 돌려드리는 일은 의무나 명령의 성취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거래 이상이다. 그것은 거래가 아니라 이미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얻기 위해 준다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멜 리스의 강연에 참석할 특권을 누렸다. 그는 당시에 재림교회에서 청지기 직분과 지역 교회 모금에 관하여 가장 조예가 깊었다. 리스는 ‘얻기 위해 준다’라는 인간의 본성에서 발견되는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복권, 빙고 게임, 기타 모금 행사를 시행하는 일부 기독교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들 행사에서는 기부자가 무언가 값진 것, 심지어 자신이 ‘헌신한 것’보다도 더 값진 것을 챙길 수 있다는 개념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이 공식적으로 주목받고 싶거나 심지어 건물 이름이 자기 이름을 따서 지어지거나 후원자 명패에 자기 이름이 적히거나 대중적인 상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특정 사업을 후원할 때 이런 개념은 더욱 확장된다. 이런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고 도우려는 이타적인 열망으로 한 일이라면 말이다. 리스는 집 근처에 살았던, 조용하고 경건한 중년의 여성 교인이 어느 날 교회 목사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여성은 자신이 드리는 십일조 한 푼에도 화가 난다고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들을 사는 일에 돈을 더 많이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헌금 때문에도 화가 났다. 왜냐하면 여행하고 싶은 여러 곳에 갈 여유가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의무에 매우 충실했고 그 규칙을 따르고자 했다.1 그는 감사의 정신이나 이미 복을 받았다는 인정보다는 자신이 이 땅에서 하는 희생에 화가 났지만 하나님의 요구를 성취하고 하늘을 얻으려는 바람 때문에 ‘얻기 위해 주고’ 있었다.
감사하는 마음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이 이미 받은 복에 대해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의 십일조를 지불해야 하며 그분이 그들에게 베푸신 재물에 대해 헌금을 드려야 한다. 그분의 자비와 은혜는 풍성하고 체계적이다. 그분은 비와 햇빛을 주셨고 식물이 풍성히 자라도록 하셨다. 그분은 사계절을 주셨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때가 순서대로 온다.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는 것보다 더 나은 무엇을 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2
핵심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청지기 직분을 거래의 형태가 아니라 감사하는 삶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하박국처럼 우리는 주머니에 거의 재화가 없을지라도 즐거워할 수 있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과 새 땅에 가는 이유는 아내의 신발을 가져갔던 우리 집 개 몰리처럼 우리가 약삭빠르고 욕심 많은 협상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구주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일 것이다.
레이 하트웰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조지아-컴벌랜드합회 청지기부장이다.
1 다음 책에서 인용했다. Melvin E. Rees, God’s Plan for Social Security(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Pub. Assn., 1970)
2 엘렌 G. 화잇, Signs of the Times(영문 시조), 1890.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