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전쟁에서 전쟁으로
나타샤 페노이는 10살 때 봉쇄와 심한 폭격으로 구소련 그루지야 공화국(현 조지아 공화국)의 이탈 지역인 고향 남오세티야를 탈출해야 했다. 1991~92년에 발생한 내전으로 이곳 주민들에게 항복하라는 압박이 가해지면서 식수, 식량, 전기, 의료 서비스가 차단됐다.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보이자 23세의 그 지역 남자가 트럭 호송단을 꾸려서 어린이들을 지역 내의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호송대에 합류하고자 나타샤의 부모는 새벽 3시에 나타샤를 깨웠다. 대기 중인 트럭까지 가려면 나타샤와 남동생은 소베츠카야 울리차 즉 ‘죽음의 거리’라고 불리는 길을 건너야 했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근처 언덕에서 저격수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타샤가 그때를 떠올렸다. “재빨리 길을 건너야 한다고 부모님이 동생에게 일러 주셨지요. 저격수가 총을 쏠 때면 나뭇잎이 마구 떨어졌어요. 조금 더 기다린 뒤 엄마가 동생을 밀면서 뛰라고 말했어요.”
나타샤가 달릴 차례가 되자 총격이 시작됐다. 뒤에서 총탄이 지나갔고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나무에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샤와 남동생은 한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지만 결국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수년 뒤 나타샤는 페테르와 결혼했고 페테르는 그 당시 남오세티야에 있는 구호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타샤와 페테르가 남수단으로 이사한 뒤 나타샤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타샤가 컴퓨터 앞에 있을 때 발생한 포격 사건은 남수단 2차 내전이 사그라들 무렵에 발생했다. 2005년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소년병들은 전역했고, 나타샤는 정신적 외상을 입은 아이 여럿을 돌보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법과 트라우마 징후들에 대해 책에서 배웠어요.” 나타샤가 말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거기서 저 자신을 보았어요. ‘와! 나였어. 내가 그랬어.’라면서요.”
트라우마에 관한 책을 읽고 아이들을 도우면서 나타샤는 처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과거를 뒤로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됐다.
“분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우면서 제 삶을 차지하고 있던 트라우마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
코로나와 씨름하다
파키스탄에서 미국인 선교사의 자녀로 성장했고, 후에 기니, 이라크, 마다카스카르에서 봉사한 샤론 피트먼은 코로나19가 자신의 가장 큰 선교 과제 중 하나로 부상할 줄 몰랐다.
말라위 재림교회 대학은 코로나 광풍에 두 번이나 휩쓸렸고 두 번 다 학생과 교직원들이 생명을 위협받고 교육 기관은 재정적 파탄에 몰렸다. 세 번째 물결이 닥쳐 학생 15명에게 양성 반응이 나타나고 이 때문에 학생 50명이 격리되어야 했을 때 은퇴 후 부총장으로 대학을 돌봤던 샤론 부총장은 낙담했다. 앞이 캄캄해 보였다.
백발을 쓸어 넘기며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저를 선교 사업에 부르실 때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셨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35년간 고등 교육에 몸담은 그였지만 이처럼 전문적인 통찰력과 지혜가 전무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부총장은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마귀가 우리 앞에 던진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세요.” 정적 속에서 세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딸아, 네가 사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대학을 사랑한단다. 물속에 발을 디뎌라. 첫 번째와 두 번째에 그랬듯이 세 번째 물결도 내가 갈라놓겠다.”
그 순간 샤론의 마음이 갑자기 환해졌다. 걱정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다. 그는 팀을 소집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했다.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샤론 부총장은 두 차례에 걸친 코로나 광풍으로 연기됐던 말라위 고등 교육 국가 회의 의장직을 맡아 개최를 준비하느라 말라위 호숫가에 앉아 있었다.
“호텔의 호숫가도 아름답고,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도 보이네요. 이런 게 바로 제가 계획했던 은퇴인데 말이죠. 주님은 유머가 넘치는 분이세요. 저를 이렇게 가치 있는 은퇴로 부르셔서 봉사도 하고 잠깐이라도 제가 꿈꿨던 은퇴의 순간을 즐기도록 호숫가의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있게 하시니 말이에요.”
세 번째 이야기
평생 선교사
멕시코가 그리운 네를리 마시아스 피게로아는 마셜 제도의 모래사장에 앉아 수정처럼 푸른 태평양 바다를 응시했다. 하나님께서 마셜 제도의 섬 에베예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셨다고 확신하면서도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훌륭한 교사와 선교사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기도 후 피게로아는 위안을 얻었다. “여전히 가족이 보고 싶지만 제 마음을 선교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피게로아 선교사가 회상했다.
네를리 선교사는 2016~17년에 에베예에 있는 동안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다. 멕시코로 돌아와서도 평생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영양학 석사 학위를 받고, 네를리는 멕시코 남부에 있는 린다 비스타 재림교회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대학은 그녀의 새로운 선교 현장이 됐고 현재의 학생들과 마셜 제도에서 가르쳤던 학생들 사이의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다.
“학생들은 낮은 자존감 등 익숙한 문제들을 지니고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해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저에게 길을 마련해 주셨는지 또 그들에게 어떻게 길을 예비해 주실 수 있는지를 말해 줘요.”
피게로아는 학생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질 때 생기는 변화를 목격했다. 그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해변가에서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켰던 일이 떠오른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생기면 여러분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네를리의 말에는 확신이 배어 있다. “결코 이전의 여러분이 아닐 것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
음식을 위한 기도
음코켈리 응웨냐는 자신의 고국 짐바브웨에서 글로벌미션 개척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요청받은 마을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살지를 놓고 가난한 교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교회 장로 하나가 자신의 집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장로의 집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집집을 방문하느라 먼 거리를 걷고 설교하는 음코켈리는 자신의 급료도 받지 못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저녁이 되어 죽을 좀 먹었던 적이 있어요.”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세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음코켈리, 너는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느냐?” 그것이 전환점이 됐다. 그는 감동받았고 변화했다.
“하나님, 만약 제가 일을 계속해야 한다면 이 가족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재림교회가 운영하는 솔루시 중등학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 비누, 기타 생필품을 가득 실은 버스가 왔다. 이 개척 선교사는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에 놀랐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분을 의지했어요.” 그는 글로벌미션 개척 선교사로 3년 동안 봉사했고 지금은 솔루시 대학에서 신학을 배우고 있다.
“글로벌미션 개척 선교사가 되기 전에는 사역에 실패할 가능성조차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선교 현장에서 일하면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게 됐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데 따르는 난관을 직면할 용기도 생겼어요. 하나님을 위해 전임 선교사로 일하고 싶어요. 저를 어디로 보내시든지 저는 갈 겁니다. 미개척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의 꿈이 됐습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가치 있는 삶
한국 출신으로 남아시아에서 봉사하는 데이지 선교사는 화상을 심하게 입었는데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는 여인을 만났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분명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다. 이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독교에 적대적인 나라에서 활동하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애드벤티스트 월드』는 그의 본명과 봉사 지역을 밝히지 않는다.
데이지는 상처를 싸맬 간단한 드레싱을 준비해 가서 그 여인과 기도했다. 이튿날 선교사는 드레싱을 갈아 주고 기도해 주러 다시 그 여인의 집을 찾았다. 데이지는 집에서도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친구들에게도 기도를 요청했다. 한 달이 지난 뒤 감사하게도 상처가 완전히 나았다.
“선교사로 지내면서 경험한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어요.” 데이지는 말했다. “놀라운 기도 응답이었지요.” 정작 데이지가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삶에 일어난 변화였다. 데이지는 기도해 주는 것이 상처 입은 그 여인에게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매일 그녀를 위해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도 유익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기도하면서 저는 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갔어요.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데이지는 자신의 마음이 그분을 닮도록 변화시키려고 하나님이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확신했다.
“선교사가 되고 나서 더 기도했고 더 많은 기적을 목격했어요. 선교사가 된 것이 너무 기뻐요. 다른 삶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앤드루 맥체스니 대총회 선교부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미션(Mission)』의 편집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