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벗으라”
거룩한 땅 위에서
나는 짓궂은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도를 넘고 말았다. 오래전 내가 다니던 재림교회 대학교에는 신학과 인근 외진 곳에 기도의 동산이 있었다. 동료 신학생들과 거기 가서 히브리어 시험에서 구제받거나 신붓감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한번은 동료 학생인 데이비드가 그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몰래 다가가서 나무 뒤에 숨은 다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데이비드,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너는 거룩한 땅에 있노라.” 그런 다음 나는 나무 뒤에서 그의 반응을 엿보았다.
나는 데이비드가 “하하! 게리, 너일 줄 알았어.”라는 식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경건하게 신발을 벗었다. 나는 갑자기 죄책감이 들어서 친구에게 급히 사과하고 동산을 빠져나갔다. 그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나와 달리 데이비드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그날 놀림을 받은 대상은 바로 내가 되었다.
경외란 무엇인가?
『킹제임스 성경 사전』에 따르면, ‘경외’란 “존중과 존경이 섞인 두려움”1을 뜻한다. 성경에서 신을 벗는 일은 제사장이 먼지 없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한 행동이다. 성전에서 봉사하기 전에 그들은 몸을 씻고 머리를 빗고 특별한 옷을 입어 경외심을 나타냈다(레 10:6; 16:4; 21:10).2
알다시피 경외심은 왕이나 신을 대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많은 문화와 종교에서 가장 존경받아야 할 대상에게 그와 같은 격식을 갖춘다. 따라서 만왕의 왕이신 분 앞에 경망하고 부주의하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러나 경외는 외형적인 행동을 넘어서 우리 삶의 모든 국면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할 때 우리는 그분의 법을 순종한다. 요한계시록 14장 7절의 첫째 천사 기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이 구절에서는 안식일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은 그분의 모든 계명을 순종해야 할 것을 내비치고 있다(출 20:8~11).
깊은 존경
하나님을 향한 이런 종류의 깊은 존중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가장 결핍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 정결, 의, 정의, 선함에서 인간과 ‘구별되신다(즉 거룩하시다.).’ 사실 하나님은 아주 거룩하셔서 “소멸하는 불”로 묘사된다(신 4:24; 9:3; 히 12:29).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유지자이시다. 그래서 그분에게 불경하게 접근하면 안전할 수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두 젊은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는 이런 사실을 아주 엄격하게 익혔다. 그런데도 여호와 앞에서 “속된 불”(1~2절, 가톨릭)을 피웠고 곧바로 소멸됐다.
왜 그런가? 엘렌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존경과 경외심으로 자신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그분에게 다가와야 할 것을 가르치고자 계획하셨다. 그분은 부분적인 순종을 받으실 수 없다.”3
아론의 두 아들은 더 잘 알았다. 그 향로에는 하나님이 붙이신 불만 사용하도록 명령받았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정음료뿐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 의식에 취한 나머지 이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어처구니없는 무례함을 내보였다(9절).
하나님이 변덕스럽거나 편협하게 행동한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아론은 공개적으로 자기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해서는 안 되었다. 불손한 삶에 대해 공개적으로 동정을 표명해 하나님의 심판을 비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발끈해서 나답과 아비후를 소멸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임재로 인해 소멸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불이 여호와의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었다(2절).
왜 그들은 소멸됐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3절).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경외받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 혹은 존경은 그분의 계명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순종함으로 입증된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서는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그분을 기다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복음
그렇다면 복음은 그중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의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 합당한 경외를 돌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 있게 다가갈 수 있단 말인가? 가장 유명한 성경절 중 하나인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을 우리는 단순히 약속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약속 그 이상이다. 이것은 경고이기도 하다. 그분을 힘입지 않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일은 위험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에게 “이상한 불”(레 10:1, 킹흠정)을 드리며 경망스럽게 행동했을 뿐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거룩하게 된 제단에서 피우지 않은 불을 하나님 앞에 가져왔다(레 16:12; 출 30:10). 다시 말해 그들은 감히 예수의 속죄하는 피 없이 아버지 앞에 왔다. 그들은 자신이 피운 불을 가져왔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예수와 그분의 피가 가져다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덕(롬 1:16~17)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의 업적에 기대어 두렵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왔다. 그들이 올바로 행동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말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빛 가운데 행하는” 일(경외)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와 그분의 은혜 그리고 거저 주시는 용서의 선물, 죄로부터의 회개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를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내 친구 데이비드처럼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신발을 더 빨리 벗을 것이다.
내가 기도의 동산에서 엉뚱한 결과를 빚는 장난을 친 몇 년 뒤 나는 우연히 데이비드를 만났다. 그는 재림교회 목사가 되어 있었고 동산에서 경험했던 일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도의 직접적인 응답이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 당시 데이비드는 설교 수업 시험에서 사용할 예화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설교 제목은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였다. 느닷없이 신을 벗으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그 메시지를 실제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가 떠올랐고 설교를 시작하기 위한 아주 멋진 예화를 얻게 되었다. 그는 설교에서 A학점을 얻었다. 아주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친구 데이비드에게, 위엄 넘치고 거룩하고 은혜가 충만한 왕의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경외심을 가지고 나가야 할지를 상기시켜 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 “Reverence,” King James Bible Dictionary, kingjamesbibledictionary.com/Dictionary/reverence.
2 엘렌 G. 화잇, 『부조와 선지자』, 343~358 참조.
3 앞의 책, 360
게리 블랜처드 대총회 청소년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