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그저 그런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
하나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맛보게 하는 기도
멜로디 메이슨
아시아에서 큰 절을 방문했던 어느 여행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곳에 도착해서 둘러보다가 사당 안에서 커다란 우상에게 참배하는 무리를 만났다. 조용히 지켜보던 여행자는 매우 특이한 모습에 눈길이 끌렸다. 참배객들이 작은 종이에 진흙을 묻혀 우상에게 힘껏 던지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쳐다보다가 그 행동의 의미에 관해 물어보았다. 종이에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기도가 적혀 있다고 했다. 그것을 진흙으로 감싼 이유는 우상에게 날아가 착 ‘들러붙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들의 종이가 우상에게 찰싹 달라붙으면 그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종이가 우상에게서 떨어지면 그 기도는 우상에게 거절당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 생각하는 기도는 이런 것과 매우 다르다. 우리는 우주의 왕에게 기도드린다고 믿고 있다. 그분은 별들을 지으시고 우리 개개인을 깊이 사랑하신다. 우리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까지도 그분은 다 들으신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어쩔 것인가?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기도가 하늘 보좌는커녕 천장도 뚫지 못한다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바로 그때가 시편 기자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즐겨 들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쁘게 응답하시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응답을 방해하는 것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우리가 허용한 것들이다. 그것은 고백하지 않은 죄(시 66:18), 불신(약 1:6~7), 무정함(막 11:26), 풀지 않은 갈등(마 5:23~24), 욕정(약 4:3), 독선(사 64:6) 및 기타 장애물들이다. 배우자를 모질게 대하고(벧전 3:7),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무관심해도(잠 21:13) 기도가 막힌다. ‘좋은 일로’ 너무 바빠서 하나님과 최고의 시간을 갖지 못할 때도 있다(눅 10:41~42). 어떤 경우에는 전자기기, 소셜 미디어 및 그분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다른 우상들(출 20:3)로 산만해져서 온전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길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우리가 만약 능력 넘치는 기도, 더 나은 기도를 하고 싶다면 진흙처럼 들러붙은 이런 방해물들을 씻어 내 달라고 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구라 불리는 라오디게아라고 하는 ‘흙구덩이’에서 살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묻은 진흙을 어떻게 씻어 낼 수 있을까?
새로운 시작
잠깐 나의 개인적인 간증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 역시 현대 기독교라는 뜨뜻미지근한 광야에서 자랐다.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가난하고 눈멀었고 헐벗은 데다가 ‘진흙투성이’였다.
감사하게도 나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재림교회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났다가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청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기도의 능력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복음의 아름다움도 깨닫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평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지냈는데도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행하신 일에 대해 내 마음은 둔감했으니. 갈보리의 사건이 개인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죄인이며 주님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형편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에 없던 부서짐을 경험했다. 나의 죄! 그렇다. 바로 ‘나의 죄’ 때문에(이번에는 정말 개인적으로 와닿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생각으로 슬픔이 몰려와 나는 울고 또 울었다. 그날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기도 여정을 완전히 새로 시작한 날이다.
이 경험 이후 나는 더 이상 타성에 젖은 평범한 재림교인으로 사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었고 ‘그분께’ 더 많은 것을 담대하게 구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고 한 번에 여러 시간 성경을 읽었다. 그분의 말씀과 사랑에 빠지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곤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나를 더 깊이 더 가까이 이끌어 주셨다. 그분을 따르는 법,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주장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 그분을 향한 사랑이 커져 갔고 기도 응답을 경험했다. 생생한 응답이었다. 어떤 때는 놀라운 응답, 구체적인 응답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시지만 종종 우리가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셨다(엡 3:20).
이러한 깊은 여정을 시작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예수님은 나에게 그분을 사랑하는 법, 기도하는 법을 부드럽게 가르쳐 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약속의 땅을 맛보게 하셨고, 나는 이제 그저 그런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매일 그분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 약속의 땅을 간다는 것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시편 34편 8절에서는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더 풍성한 삶에서 압도적인 기쁨을 맛보았는가? 기도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능력을 발견하였는가?
효과적이고 활기 넘치는 기도 생활의 열쇠를 찾고 있다면 그것은 복잡하지 않다. 하나님은 영적 슈퍼 히어로를 찾고 계신 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에게 그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는 사람, 온 마음으로 그분을 찾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분은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상태에서 진흙을 제거해 주시도록 자신을 내어놓고, ‘응답하실 때까지 끈기 있게’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무엇보다 그분은 하나님을 매일 첫째로 삼는 사람, 잡동사니와 휴대폰과 기기들과 심지어 수많은 ‘좋은 일’을 다 걷어치우고 자신의 발아래서 최고의 선물 즉 그분 자신을 즐길 사람을 찾으신다.
격변의 시대이다. 아픔과 고통이 여기저기 넘쳐난다. 생존 투쟁, 먹고사는 문제, 청구서 지불에 급급한 듯한 세상이다. 이 세상의 유혹은 계속해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매일 자기를 먼저 찾으라고 하신다. ‘잠잠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에게 가장 절박하고 긴급하게 필요한 존재는 바로 나란다. 다른 것은 모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지금 너에게는 내가 필요하단다.’
우리를 가로막은 방해물을 제거해 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자. 무릎으로 전진하자. 담대하게 더 많이 구하자. 무엇보다 그분을 더 많이 구하자.
*엘렌 G. 화잇, 『치료봉사』, 161
멜로디 메이슨 『담대하게 구하라』의 저자이며 대총회 기도사역부에서 일하고 있다.
사이드바
더 깊은 기도를 위한 다섯 가지 열쇠
1. 예수님에게 모닝콜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라.
2. 어떤 죄를 고백하고 아뢰어야 할지 그분께 여쭈라.
3. ‘디지털 디톡스’를 고려해 보라. 실제적인 도움을 위해 다음 사이트에서 프랭크 하젤의 기사 ‘Unplugged’를 읽어 보라. https://adventistreview.org/issue-archives/page-2015/page-1511/1511-30/
4.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라. 이에 관련하여 다음 사이트를 참조할 수 있다. https://www.revivalandreformation.org/resources/all/praying-the-word-prayer-and-promise-card
5. 돌파구를 찾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 포기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