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난생처음 재림교인을 만났다
영원히 기억에 남을 사람
루 V. 매리언, 정리: 바이올렛 매리언
빈 봉투 몇 개를 손에 들고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젊은이 두세 명이 그를 도와 식료품을 날랐다.
안식일 준수 재림교인들을 처음 만났던 아주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면 매우 특별한 어르신 한 분이 생각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군 복무를 피하고자 국경을 넘어 오늘날 이탈리아의 북동부에 있는 트리에스테로 간 것이 1952년 내가 겨우 19살 때였다. 그 당시 트리에스테의 자유 지역은 연합군정이 통치하고 있었다.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는 난민 약 1만 명이 트리에스테에 있었다. 난민 캠프는 모두 다섯 곳에 흩어져 있었다. 트리에스테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진 오피치나 캠프에서 예방 접종과 검진이 전부 진행됐고 3주 뒤 난민들은 나머지 네 곳 중 한 곳으로 배치됐다. 아픈 사람들은 병원으로 사용되는 프로세코 캠프로 보내졌다. 미혼 남자들은 제수이티의 구 지역에 있는 버려진 감옥으로 보내졌다. 남은 난민들은 트리에스테에 있는 산사바 본관과 산사바 별관으로 나뉘어 보내졌다.
내가 배정받은 산사바 별관은 난민 캠프 중 최고였다. 건강한 사람들이 그곳으로 왔다. 막사 44개가 있었고 대부분 가족이 머물렀다. 제수이티 감옥이 아니라 산사바 별관으로 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그때도 느낄 수 있었다.
이민 가는 데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트리에스테에서 나의 주 관심사는 구직이었다. 음식과 침대는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나는 빈둥거리고 싶지 않았다. 산사바 별관에 정착한 지 한 달 뒤, 캠프의 주방에 공석이 생겨서 그 자리에 지원했다. 돈을 넉넉히 주지는 않았다. 한 달에 미화 4달러 정도를 받았고 몇 벌의 옷도 따라왔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이민도 더 빨리 가는 것 같았다.
5명씩 교대로 모두 10명이 주방에서 일했다. 우리는 국적, 문화, 종교가 다양한 1,400명을 먹였다. 43호 막사에 사는 사람들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조금 달랐다. 토요일마다 모여서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캠프의 중앙에 있는 작은 주방에서 자신들의 음식을 요리해 먹었다. 당번인 날 아침마다 동료 일꾼과 나는 우유통을 작은 주방 문 앞에 갖다 놓곤 했다. 금요일마다 더 큰 우유통을 갖다 놓았지만 토요일에는 아무것도 갖다 놓지 않았다. 왜 저 사람들은 캠프에 있는 사람들과 생활 방식이 약간 다른지 종종 궁금했다. 한 번은 동료 일꾼이 “지난 전쟁 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비 온 뒤 따뜻한 가을 날씨의 버섯처럼 늘어나고 있어요.”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큰 주방은 음식을 분배하는 곳이었다. 한 어르신과 그를 돕는 사람들이 우리의 창고에서 일주일에 두 번 식료품을 작은 주방으로 가져갔다. 이 어르신이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이유는 그의 신사다운 행동 때문이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왔고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자기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말했던 동료는 기분 나쁜 말로 어르신에게 폭언을 일삼았고 그 당시 내게도 그렇게 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도 어르신은 침착함을 유지했고 그의 반응을 보면서 둘 중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어르신은 가장 별난 상황과 장소에서도 참다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분이 난민 캠프를 떠난 뒤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을 다시 만날 날을 나는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사이드바
이 이야기에서 나의 아버지 루 매리언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 어느 재림교인과 처음 대면했던 일을 소개한다. 이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심겨진 씨앗과도 같았다.
부친은 이 난민 캠프에 있다가 1950년대 중반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청년 시절에 아버지는 호주를 횡단하면서 빅토리아의 질롱이라는 마을에 정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면서 다른 재림교인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씨앗에 물을 주는 역할을 했고 아버지는 질롱에서 북서쪽으로 6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멜버른의 세돈 재림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어머니 로사를 만났다.
아버지는 평생 여러 가지 난관을 겪었지만 1994년 8월에 별세할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지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하며 그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한다. 귀한 구주이신 하늘 아버지를 영원한 본향에서 만날 날이 나는 그립다.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 모두 그날까지 신실하고 충성된 하늘 아버지의 대표자들로 남아 있기를 기도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정확성을 위해 일부를 편집했다.
1950년대 초에 유고슬라비아와 소련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태생인 루 V. 매리언은 이후 호주에서 살았다. 그의 딸 바이올렛 매리언은 호주 빅토리아의 하이델버그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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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바 별관 캠프의 주방에서 루 V. 매리언(가운데 줄 맨 오른쪽)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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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젊은 시절의 루 V. 메리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960년대 후반 멜버른 식물원에서 포즈를 취한 루와 로사 메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