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신뢰의 문제
기도는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
프랭크 M. 하젤
천 년 동안 드린 기도라고 해서 첫 기도보다 하나님이 더 잘 받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행동이나 품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성 때문에 기도가 응답받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 점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용서와 인도를 구하는 우리의 요청에 “그분의 이름을 인하여”(시 31:3; 109:21; 렘 14:7) 응답하신다. 우리가 먹을 것을 구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독이 있는 전갈을 주지 않고 훨씬 더 좋은 것을 즐거이 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눅 11:12~13). 우리가 기도하면서 찾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선하심, 신실하심, 사랑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삶의 매 순간 계속 기도한다 해도 우리의 기도는 그분께서 받으실 만큼 충분한 기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기도
인간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은 심각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놀랍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다. 기도에 대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요청을 들어주고자 갈망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간청은 순전히 이기적인 목적에서 비롯할 때가 많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이 성공적이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그 사업에서 내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누군가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혼자 살아가기가 싫기 때문일 수 있다. 누군가 회심하기를 기도하는 이유는 그러면 내 삶이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님께 특별한 것을 구하는 이유는 특정한 삶의 수준에 익숙해져 있고 더 적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식의 기도를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1
불행하게도 죄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밀어 넣고 삶과 수많은 기도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자신이 중심이 되다 보니 ‘자기’의 욕구,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 ‘자기’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 자기중심적이다 보니 득점 기록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경향이 생기고, 불만과 함께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무언가를 획득하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다. 건전한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최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기도이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기에 우리는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신뢰한다.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신비롭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연약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그분은 언제나 진실한 기도를 모두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우리의 기도에 즐겨 응답하시고 기쁘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신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천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를 도우신다(렘 33:3).2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부드럽게 사랑하신다. 우리를 위해 늘 최고를 바라신다. 그 은혜 가운데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고자 하신다. 우리의 창조주요 구원자로서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차마 요청할 수 없는 것도 우리에게 주신다.
궁극적으로 기도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신뢰의 문제다. 우리는 주저 없이 그분의 손에 삶을 완전히 떠맡길 정도로 그분을 신뢰하는가? 그분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을 과감히 구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분이 자신의 타이밍에 따라 제공하실 것이라고 온전히 믿는가? 하나님은 선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천 가지 도움을 알고 계신다고 믿으면서 겸손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전능한 손에 맡길 때만 이것이 가능할 것이다. 성경의 수많은 인물이 이것을 경험했다(출 14:13~14; 고후 14:10~12; 20:15, 29; 눅 1:46~55). 그들이 넘을 수 없는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적으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도움과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다름 아닌 자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때이다. 그분의 뜻에 맞추어 삶의 방향을 정할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일, 가족, 우정, 데이트, 결혼, 양육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교회에서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통근 중에, 설거지 중에 또는 세탁을 하며 기도할 수 있다. 컴퓨터를 하면서도, 직장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 특별한 시간을 떼어 놓을 때 우리는 의미심장하게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 경작된 마음밭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게 기도하면 우리의 태도가 변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모으고 그분의 타이밍을 신뢰하기에 사실상 우리의 삶이 변한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때만 얻을 수 있는 우리에게 몹시도 필요한 새로운 시각을 우리는 기도하면서 얻는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면 삶이 새로워진다. 기도하면 믿음이 강해지고 희망의 불꽃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용기가 솟고 하나님께 나아갈 거룩한 담대함이 생긴다. 전능하신 창조주, 사랑 넘치는 구주를 기뻐하기에 우리는 다른 것을 갈망하거나 우리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서 자유로워진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을 때만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죄 아래 있으면 그냥 평평하게 보인다.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게도 주기도문을 단순히 립 서비스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생각 없이 반복하다 보니 얼빠진 습관으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만약 작심하고 뜻을 품고 기도한다면 이것은 가장 무시무시하고 혁명적인 기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나라’를 추구하고 그분의 이름을 경배하고 그분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더욱 그분을 닮아 갈 수 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유혹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그분께 즐거움이자 남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첫째로 모신다면, 우리의 영혼이 그분을 갈망한다면, 마음으로 그분을 기뻐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신다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살짝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경외감에 사로잡힐 것이며 하나님의 특징인 이타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 선명하게 초점을 맞춘다면 그분의 선물은 우리의 모든 갈망을 채우고도 남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랭크 M. 하젤 대총회 성경연구소 부소장이다.
1 Frank M. Hasel, Longing for God: A Prayer and Bible Journal (Nampa, Id.: Pacific Press Pub. Assn., 2017), pp. 42~45
2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330
발문
우리가 기도할 때는 다름 아닌 자신의 기쁨을 위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