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오늘 나는 용서하기로 했다
(글쎄, 아마도)
수년 동안 용서 때문에 말하자면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로 나는 괴로워했다.
교통 체증 속에 누군가 내 앞으로 끼어들기를 하거나 긴급한 질문에 응답 문자가 빨리 오지 않는 경우, 이웃집 아이가 상식적이지 않은 시간에 뒤쪽 현관에서 트럼펫 연습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정말 큰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사과도 자백도 배상도 받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상처. 내 삶의 방향을 영원히 바꿔 놓은 고통을 용서하기로 선택하고자 몸부림쳤다.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정작 자신이 독약을 마시면서 나를 괴롭힌 상대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사님은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그냥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고 조언한다. 과거의 고통이 아직도 너무 아프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처럼 되라
나는 가족에게서 또 안식일학교에서 아주 어릴 적부터 용서에 대해 배웠다. 나중에 어린이집에서 유아들을 돌보며 온종일 이 중요한 가치를 가르치게 되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는다. 그러면 당한 아이는 마음이 상해 큰 소리로 울며 자지러진다. 장난감을 가져간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얼른 깨닫고 돌이켜 사과하고 포옹한 뒤 그 장난감을 돌려준다. 시끄러운 상황은 시작되자마자 금방 끝이 나고, 두 아이는 장난감을 바닥에 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함께 웃고 돌아다닌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어린아이들처럼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쉽사리 용서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아픔을 공감할 수 있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아이였을 때 사랑에 대한 내 생각을 뒤집는 일들이 일어났다. 항상 용서하라고 배웠지만 나는 왜 고통을 내려놓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기간 나 자신만을 질책했다.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났다. 그런 상황에서 사과나 해명, 배상이나 개선도 없었다. 내게는 추악한 분노와 떨쳐 버리지 못하는 죄책감만 남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괴로웠다.
분노와 함께 우울증까지 겪으면서 내 마음은 굳어졌다. 나는 나 자신도 싫어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방식으로 그분을 섬길 수도 없었다. “예수님께 맡기면 고통을 치료해 주셨을 텐데.”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 용서하라는 ‘말을 듣는 것’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힘들어질 때가 많다.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다는 죄책감만 든다.
실제로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 고통을 그분께 맡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고통은 다시 찾아왔고 나는 짜증 내며 실망했다. 얼마 후 그것을 다시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나의 쓰라림과 절망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나 내 고통을 하늘에 맡길 때마다 그것은 더 어둡고 희망이 없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주님의 기도에서 배운 교훈
몇 년 전 주님의 기도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목사님은 용서의 신비로움을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내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나의 과실을 용서하신다. 분명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받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마 6:14~15 참조). 내 죄는 다른 사람과 다른 척도로 심판받는 게 아니다. 용서에 관한 문제를 제대로 따지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분명해졌다.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참조)는 말씀도 하셨다. 나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그들은 내 속을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정서적으로 망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무슨 피해를 입혔는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위해 기도했더니 내 마음이 바뀌었고 나에게 치유가 시작됐다. 어쩌면 그들의 마음 또한 치유될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내게 상처 준 이들을 위해 기도했지만(그다지 신실한 기도는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님께 그들을 치유해 달라고, 그들의 눈과 마음을 열어 죄의 감정을 없애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달라고 진심으로 간구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 마음은 서서히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고통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대신에 나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내가 이해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고통을 인지하다
생각나지 않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요셉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그토록 잔인했던 형제들을 알아보고는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기 전에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2). 그런 다음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형들이 초래한 고통을 고스란히 마주했지만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요셉의 이 경험을 통해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이겨 내려고 애썼던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요셉처럼 나도 기억 속에 있던 장면들을 되새기며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더 솔직하게 하지만 덜 신경질적으로 그 기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나쁜 일이 일어났고 삶은 엉망이 된 것이 사실이다. 어두웠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지만 기억을 면밀히 되짚어 보니 나를 괴롭힌 그 괴물들은 사실 죄악 세상에서 상처 입은 자들임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고통이 발생할 만큼 삶의 상황이 악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감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처받은 분노에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복수심 가득했던 기도가 동정 어린 기도로 바뀌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얼마나 큰 사랑으로 그들이 용서받도록 기도했는지를 생각하니 내가 겪은 고통의 순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복수심을 내려놓았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7~19).
나는 도덕적 또는 법적 책임을 면제해 주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과 세상의 법 앞에서 책임이 있다. 그리고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전문적인 상담을 꼭 받아야 한다고 나는 강력히 권한다. 내가 말하는 용서란 가해자가 또다른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도록 그냥 놔두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어린이를 해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마 18:6; 막 9:42; 눅 17:2).
삶이 바뀌다
이렇게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삶이 바뀌었나요? 당신의 분노와 절망이 완전히 치유되었습니까? 완전한 용서를 선택했습니까?’ 짧게 대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들이 있고, 치유와 이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매일 나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내 자유에 관한 것이다. 용서는 엄청난 능력이 담긴 자유를 가져다준다.
용서는 정의가 아니다. 화해도 아니다. 그 이후로 쭉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나는 그분이 모든 인류의 작은 부분까지 전부 알고 계시며 놀라운 사랑과 단호한 판단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긴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외롭고 두려운 사람들, 매우 힘든 상황에 부딪친 이들을 돕는 일은 귀한 특권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내가 자유와 평안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는지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 13:11).
미셸 노퍽 가명이다.
발문
내 고통을 하늘에 맡길 때마다 그것은 더 어둡고 희망이 없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