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헌신
커리사 터로시언
2022년 6월 9일 오전 예배에서 전한 말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막달라 마리아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일곱 귀신을 그녀에게서 쫓아내셨다고 말한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귀신들이 그녀를 “집”이라고 불렀다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이 되는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날, 그분은 그녀의 삶을 바꾸셨다(고후 5:17 참조). 주님을 만난 뒤 마리아는 그분에게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그분의 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고 그분이 가는 곳이면 자신도 따라갔다. 삶의 모든 행위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시련 속에서도 그분을 믿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이 들자 두 자매는 예수님께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 11:4). 우리는 나사로의 부활을 알고 있지만 당시 자매가 아는 것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죽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흘 뒤 예수께서 오셨고 마리아는 달려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린다(32절). 우리도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가장 큰 이적은 나사로를 위하여 행해졌다.”1 나사로의 경험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기도하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흘이나 늦으신 듯 보이지만 여전히 제때 오셨기 때문이다.
최고의 헌신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헌신적 행위의 절정은 갈보리 사건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 예수님으로부터 나병을 고침 받은 바리새인 시몬은 감사의 뜻으로 예수님을 베다니에 있는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시몬은 전통적인 관습과는 달리 예수님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요한이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요 11:2)라고 밝힌, 초대받지 않은 여자가 집으로 들어설 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분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들었다. 마리아는 그분의 시신에 기름 부을 슬픈 날을 대비하여 1년치 급여에 달하는 향유 옥합을 구입했다. 그때 거리에는 예수께서 곧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리아는 왕을 위해 완벽한 선물을 준비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자신이 시몬의 잔치에 음식을 공급할 예정인데 예수님도 가신다고 말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눅 7:38).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그분이 그녀를 위해 하신 모든 일과 그녀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마음속에 물밀듯이 흘러넘쳤다. 갑자기 그녀의 선물은 예수님께 드리기에 너무 부적절해 보였다.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트리자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샘이 그 병과 함께 부서졌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머리카락은 곧 자신의 영광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마리아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께 ‘주님, 주님의 가장 낮은 부분이 저의 가장 높은 부분보다 높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희생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데 유다는 돈 냄새를 맡는다. 제자들도 함께 비판하며 그의 편을 들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돼! 저 여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300데나리온을 하수구에 쏟아 버렸다’(요 12:4~5 참조). 또 다른 경우를 보면 예수께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 정확히는 남자 5천 명과 그들의 아내, 아이들이었는데 빌립은 예수께 200데나리온으로는 그 비용을 충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요 6:7). 300데나리온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마리아의 선물은 수천 명을 먹이는 자금이 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시몬은 속으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마리아가 공공연하게 부도덕한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성경의 섬세한 표현 방식이다. 시몬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마리아와 같은 집안의 여자가 어떻게 귀신이 들리고 또 창녀가 되었을까?
『시대의 소망』에서는 이 구절에 내포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몬은 지금 자신이 멸시하는 여인을 죄의 길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는 그 여인에게 못된 짓을 저질렀다.”2 또 다른 구절에서 엘렌 화잇은 시몬이 나사로의 삼촌이었고, 그러니 그녀의 삼촌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시몬의 수치스러운 엄청난 비밀을 폭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대신 다음과 같이 정곡을 찌르는 말로 요약되는 비유 하나를 언급하셨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그런 다음 마리아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이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말씀하신다. 마리아가 준 선물의 향기를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신 것이다. 왜일까?
그분은 자기의 발 앞에 깨진 향유 옥합에서 곧 우리를 위해 부서질 자신의 몸을 보셨다. 귀한 향유가 바닥에 흘러 버려지는 모습에서 그분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28절) 대부분이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보혈을 보신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자신의 모습을 보셨다. 오직 사랑만이 예수님을 갈보리로 이끌었다. 마리아의 값비싼 희생으로 하늘의 사랑이 쏟아지는 것을 목격하셨다. 예수님은 ‘그는 힘을 다하였다’(막 14:8)고 말씀하셨다. 그분 또한 우리를 구하려고 모든 힘을 다하셨다.
거울에 반사된 모습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서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보셨다. 그것은 곧 그분의 품성이다. 유다는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그러나 그분은 그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자기 삶의 옥합을 깨뜨릴 정도로 값진 분이시다. 당신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인가?
사람들은 살아 계신 구주도 쉽게 받들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죽어 가는 분 옆에 충성스럽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를 구하신 날부터 자기를 위해 죽으시는 날까지 마리아는 그분의 헌신적인 제자였다. 마지막까지 십자가에 있었고 그분의 무덤으로 가장 먼저 달려갔다.
그 일요일 아침에 텅 빈 무덤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알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무덤을 확인하려고 달려갔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요 20:10~11).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예수님을 향한 헌신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모두가 마리아를 멀리했을 때 예수님은 그녀 곁에 계셨다. 아무도 마리아를 믿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가치를 알아보셨다. 가족조차 마리아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편에 서셨다. 마리아의 오빠가 사망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제자들이 마리아를 비난했을 때 예수님은 옹호하셨다. 그녀가 학대받을 때 예수님의 사랑이 그 상처받은 마음에 치유와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을 때도 마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4~16절).
아무도 예수님처럼 마리아를 부른 사람은 없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나는 예수님을 잡고 싶은 마리아의 애절함에 대해 탓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이유로 자신을 놓아 달라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희생이 아버지께 가납되었다는 보증을 받기까지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이 드리는 경의를 받지 아니하셨다.”4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이 가납되도록 하늘로 올라가실 것이었다. 타락하지 않은 우주 전체에 진동하는 열광적인 함성을 상상해 보라. 온 하늘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산의 그늘 속에서 사랑하기에 자기를 찾는 헌신적이고 슬픈 여인을 예수께서 아셨기 때문에 모든 하늘은 기다렸다.
그 만남 후 마리아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문이 잠겨 있는 다락방으로 뛰어 들어가 “방금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주님을 만난 사건이 마리아의 모든 것을 바꾸었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바꾼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는 마지막 때 백성을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마리아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의 주 예수님, 주님을 위해 가겠나이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께 헌신하겠나이다.’라고 오늘 고백하지 않겠는가?
1 엘렌 G. 화잇, 『시대의 소망』, 524
2 앞의 책, 566
3 영문 『시조』 1900년 5월 9일
4 『시대의 소망』, 790
커리사 터로시언 기도 코디네이터이며 호주 뉴사우스웨일스합회 복음 전도 팀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