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온전함
빌 노트
“성실, 변함없는 성실은 삶의 모든 관계에 항상 함께해야 할 원칙이다.”*
전 세계 목회자와 교회 행정가들에게 지도자의 성실성(integrity)에 대해 세미나를 진행할 때 나는 문법 교사처럼 질문하며 시작할 때가 많다. “‘성실’이라는 말의 원뜻은 무엇일까요?” 보통 처음에는 ‘정직’이나 ‘윤리적 특성’, ‘질서의 존중’과 같은 답변들이 나온다. 이 모든 대답은 ‘성실’의 범주에 해당하는 뜻이지만 중심적인 뜻은 아니다.
그런 다음에는 접근을 달리해 질문한다. “성실 즉 ‘인테그러티(integrity)’와 비슷한 말을 어디서 많이 들었지요? 초등학교 산수를 생각해 보세요.”라고 하면 곧 누군가가 알아듣고 대답한다. “인테저(integer, 정수[整數])요.” 그런 대답이 나오면 나는 또 묻는다. “정수란 무엇이죠?” 오래전에 배워 어렴풋이 떠오르는 뜻을 더듬어 찾다가 누군가 큰 소리로 대답한다. “정수는 범자연수(whole number)입니다.”
“맞습니다.”라고 내가 대답한다. “‘성실성’을 지닌 사람이란 범자연수 즉 자연수와 0과 음수를 전부 지니고 있는 ‘온전한 사람’을 뜻합니다. 물론 성실에는 정직, 윤리적 특성이 다 해당됩니다만 성실의 근본적인 뜻은 온전함입니다. 일관성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이지요.”
당연한 말이겠지만 무너져 버린 변덕스런 죄인들은 절대로 제힘으로 온전함을 이룰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수양하고 행동에 세심하게 경계를 긋는다고 해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길 수는 없다(자기 수양과 신중하게 행동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성실성에 내재한 온전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이 받을 수 있는 은혜에서 늘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의로워졌다는 선언을 그분에게 들으면서 그분과 계속 동행하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온전함이라는 덕을 자라게 하신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 우리에게 친숙한 이 ‘성령의 열매’ 목록에는 타인의 성실(온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일도 암시되어 있다.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복음의 힘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갈 4:19) 신실하게 증언할 때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 세상은 이웃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온전함을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야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계시는 분이심을 인정한다.
이번 달 『애드벤티스트 월드』에서는 굳이 ‘온전함’이라는 말을 본문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방식으로 온전함이라는 주제를 탐구해 나가려고 한다. ‘포커스’에서는 주목받고 있는 세계적인 드라마 프로젝트에 대해 소개했다. 이 영상물은 갈등에 빠진 청년들이 자신에게 친숙한 미디어를 활용해 온전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되었다. 또 ‘글로벌 뷰’ 칼럼에서 윌슨 목사는 마지막 때를 맞이한 남은 무리를 향해 기별에 온전히 충실하라고 호소한다. 새로운 운동을 소개한 기사 ‘예배를 회복하라’에서는 성실과 온전함이란 꾸준한 가정 예배를 통해 가장 먼저 습득되고 가장 훌륭하게 키워 나갈 수 있음을 되새겨 준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여러분뿐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동료와 주변의 형제자매들까지 더 성실하고 온전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 엘렌 G. 화잇, 영문 『시조』, 1884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