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먼저 가시덤불이 눈에 들어온다.
오솔길을 뒤덮은, 길이가 5cm나 되는 가시들이 셔츠를 잡아채고 살을 찌른다. 세월의 풍상과 자연 속에 묻힌 골로새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때 여기도 가족들이 살고 아이들이 뛰놀던 곳이었다는 증거는 빽빽한 가시덤불 틈으로 드문드문 보인다. 낡고 낡은 벽돌의 잔해들이 아직 발굴되지 않은 흙무더기를 관통하고 있다. 뙤약볕 내리쬐는 언덕 위로 드러난 초승달 형태의 로마 원형 극장 앞에서 수천 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했을 당시, 수신자들은 아마도 어느 교인의 집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그 도시는 쇠퇴하는 중이었고 그들의 교회는 작았다. 가시덤불 속에서 대단한 일이 생길 가망은 없을 터였다. 부, 상업, 예술, 문화는 젊은 시민들과 함께 더 나은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기회는 늘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이런 도시에 그리스도인 교회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음의 행위였다. 복음에는 부나 명성, 예술이나 문화, 정치나 유행이 수반될 필요가 없다는 믿음 말이다.
이교의 신상들과 천사 숭배로 둘러싸인 이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성경의 기록 중에서 가장 웅장한 글을 써 보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3, 17)
세월의 풍상 속에서 자신들과 교회가 잊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바울은 사랑과 경외감으로 그 자신들이 머리를 조아렸던 여호와께서 이 지구뿐 아니라 그 너머까지 다스리신다는 점을 그들에게 다시 알려 주었다. 실제적 또는 상징적 의미의 가시들이 앞길을 막고 희망을 찢어 놓을 때 그들은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골 1:16)되었다는 확증에서 위로를 찾았다. 지진으로 땅이 들썩거리고 우정이 사그라질 때, 조롱받고 몸이 쇠약해져 믿음이 흔들릴 때 그들은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았다.
이 메시지가 오늘날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눈앞에도 가시가 있다. 길을 막고 꿈을 비틀어 놓는 장애물들이 있다. 우리를 뒤잇는 이들 즉 우리의 자녀와 손주들과 친구들과 초신자들과 함께 믿음도 사그라질까 봐 우리는 걱정한다. 교회를 파릇파릇하게 하고 희망을 일으켜 줄 단비는 언제쯤 내릴지, 막을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활약하는 모습을 언제 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수백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아프게 하는 가시들은 사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싸움임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엡 6:12).
그런데 그 가시 한가운데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 계신다. 그분은 과거와 미래를 다스리시며 바로 지금, 우리의 작고 희미하고 불확실한 이 현재에 무한한 능력을 가져다주신다. 그분이 다스리지 않는 곳이란 없다. 그분께 고개 숙이지 않는 권세란 없다. 그분의 면류관은 가시로 만들어진 면류관이다.
어떤 고난을 받고 있더라도 교회여, 용기를 내자.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비교 불가한 그리스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