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란 어떤 사람인가?
마가복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매우 독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 8:22~25).
다른 모든 치유 사건을 보면 예수께서는 단 한 번의 만지심 혹은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그런데 왜 이 시각장애인을 치유하실 때는 두 단계의 상호작용이 필요하셨던 것일까?
마가복음 8장의 전개 순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는 이적으로 4천 명을 먹이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표적을 원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는데, 이것은 믿음의 부족을 상징했다(1~2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뒤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하여 궁극적인 질문을 하셨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절)는 질문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내용은 믿음이다. 이 시각장애인을 예수께 데려온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결국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지녔던 사람은 맹인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10세 소년이었을 때 나는 하지 말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용접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잠시 시력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먹고 씻고 입고 걷는 일 모두를 가족들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했다. 나는 가족들을 내 눈처럼 신뢰해야만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그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려가셨을 때 그 맹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눈처럼 신뢰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자, 그는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자라난 것이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을 때 그는 사물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한 인격자로, 치료자로, 삶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으로 온전히 믿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과정을 통해 믿음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사람을 신뢰와 믿음의 자리로 이끌며 그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신다.
제자 되는 법 배우기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방식이다. 그분께서는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 각자가 어디쯤 서 있는지 다 알고 계신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약할지라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끄셔서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키울 수 있도록 확실한 증거를 주시면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신약 성경에서 ‘제자’로 번역된 단어는 ‘마세테스’인데 이것은 헬라어 동사 ‘배우다’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란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계발시키며, 그분에 의해 회복되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특별한 열두 제자는 바로 이 과정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택하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후 내보내셨다(막 3:13~15).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들 다시 말해 어린이, 외국인, 나환자, 서기관, 여자,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음해하려는 자들에게 그분이 위엄과 동정과 진실함으로 다가가며 관계 맺는 모습을 제자들은 지켜보았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한 뒤에 ‘파송’되어서 예수님처럼 행하고 관여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고 질병과 장애를 치유하고 죽음을 치유했다.
그들은 외형적인 규칙들을 따르기보다 용서, 자기희생, 내적 마음의 변화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마땅히 각 사람의 고유한 가치와 잠재력에 초점을 맞춰, 자아를 내려놓고 섬기는 마음으로 이끌어 주며 사역해야 했다. 결국 예수님의 코칭과 멘토링 덕분에 제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자도 과정의 지도자가 되었다.
개인적 제자도는 하나의 과정이다
제자가 되는 과정은 오늘날도 거의 동일하다. 의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즉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의도적인 습관, 하나님과 대화하며 듣는 것,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안식일에 쉬고, 감사함의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발전시키는 생각을 하고 믿고 행하는 습관을 배우게 된다.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타인과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막 12:30~33). 엘렌 화잇이 진술한 바와 같다. “은혜 안에 계속 성장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 안에서 발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교제를 유지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성장을 누릴 특권이 있다.”1
첫 열두 제자가 그랬듯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분의 형상대로 변화되는 결과를 얻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가 완전히 마쳐지기 전에라도 우리는 ‘보냄’을 받아 긍휼과 진리와 용기를 지니고 예수님의 성품을 비출 수 있다. 가정, 학교, 직장, 지역 사회에서 예수님을 위해 살면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에서 그런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마당이라는 도시에 있는 교회의 두 장로는 고졸 출신 실업자 청년들이 늘면서 지역 범죄율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이 ‘마당 거리의 소년들’에게 매주 1회 음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교회는 음식뿐 아니라 보살핌도 베풀었다. 얼마 뒤 그들은 그 소년들에게 성경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지 물었다. 소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그들은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제공해 주었고 몇 가지 기본적인 자기 계발 질문지도 나눠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활동으로 교인들은 더 큰 동정심과 비전이 생겼고 그 마을에서 범죄는 줄어들었다. 거리의 소년 중 일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결론
남태평양지회는 에베소서 4장 15절에 기초하여 ‘제자는 모든 면에서 점점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이다’라는 표어를 정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과정에서 향상한다고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과 같이 된다는 것은 “현세에서 끝나지 않고 내세에서까지 계속될”2 목표이기 때문이다. 인내, 십일조, 언어, 건강 식생활, 태도 등의 문제로 씨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해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세워 주면서(살전 5:11) 제자를 삼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1 엘렌 G. 화잇,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292
2 엘렌 G. 화잇, 『교육』, 19
글렌 타우넌드 호주 시드니에 본부를 두고 있는 남태평양지회의 지회장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예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믿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 ‘예수님과 함께’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되었던 신앙적 습관은 무엇인가? 잘 익히지 못하는 습관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3.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줄을 남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4. 가정, 학교, 직장, 지역 사회에 ‘보냄’ 받아 남들에게 축복이 되었던 경험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