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는가
전쟁 중
대쟁투는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2022년 2월, 내 일신상에 영향을 준 세 범주의 중요한 전쟁을 나는 목격했다. 어느 날 밤, 병원에서 자원봉사 원목으로 일하고 있는데 입원실에서 한 젊은 부부가 미숙아로 태어난 여자 아기를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는 싸움은 아주 치열했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키 45cm에 몸무게가 1.8kg밖에 안 되는 아기에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나는 그들을 안아 주었다. 우리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싸움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안타깝게도 그 여자 아기는 사망했다.
2월 24일에 어둠이 우크라이나를 덮었다. 무의미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옥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피난민이 발생했다.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었던 우리 부부는 4월에 우크라이나에 가서 이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도와주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고아들과 하루를 보낸 뒤 우리는 그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이 아이들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도하는 강의에서 토론이 열렸을 때 학생 중 한 명이 정확히 2년 전에 자신의 남편과 오빠가 총에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수업에 함께한 학생 모두는 전쟁이 그 학생의 삶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후에 남편과 오빠는 결국 사망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독특한 삶에 대한 본질적 사실을 입증한다. 즉 우리 모두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하면 ‘왜 우리가 고통을 겪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우주적인 쟁투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 부여하신 자유 의지 때문에 악이 존재하고 번성한다.1 천사 중 한 존재, 나중에 사탄으로 알려진 그의 자유 의지로 인해 이 우주에 대쟁투가 일어났다. 하나님 앞에 서 있었으며 ‘샛별’이라 불린 루시퍼(겔 28:12~15)는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하였다(사 14:13~14). 루시퍼는 하나님께 대항해 ‘논쟁(polemic, 전쟁)’2을 시작했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선동은 성공해서 천사 중 일부가 속아 그와 함께 반역에 참여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악을 즉시 뿌리 뽑지 않으셨다.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땅으로 쫓겨났다(계 12:7~9).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떠나기로 선택하고 그분의 의로운 법을 의심했을 때(창 2:17) 그들은 자신들과 모든 후손에게 피해를 주었다. 사탄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 부르며 의심의 씨앗을 퍼뜨려서 속이는 일을 거들었다(창 3:5).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공격은 그 의심의 씨앗 덕분에 결실을 보았다(1~5절).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라는 열매를 맺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하나님의 이 열매는 우리의 삶과 우리 주위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소생시킨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죄 된 본성의 소욕”을 선택할 때 우리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19~21절)의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우리의 삶과 다른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악과 사망이 아직 소멸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패배했지만 아직 소멸하지는 않았다
비참하게도 에덴동산에서 첫 아담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올바르게 대표할 권리를 잃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이 지구는 선악의 전쟁터가 되었다. 죄가 왕 노릇을 하고 사망이 이르러왔다(롬 5:21). 그러나 둘째 아담께서는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21절) 하려고 십자가에서 의기양양하게 악과 죽음을 물리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땅의 참된 왕이 되셨다(요일 3:8).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미 다스리고 계신다(히 1:3). 그러나 예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3
새 창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라고 외친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시다. 그리고 그는 새 창조로 새로운 세상을 세우셨다. 그러나 인간들은 새로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지를 여전히 배워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하려는 자들을 격려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교전 지역에 살면서
교전 지역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는 악이 도둑질, 살인, 파괴를 일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요 10:10). 처음에 언급한 세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여자 아기를 잃어버렸음에도 부모가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절망에 빠진 삶은 무엇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남편과 오빠가 살해당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사람은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수용소에서 아내, 부모, 형제가 살해되었던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빅토르 프랑클은 의미에 관한 탐구에 힘입어 잔악한 대학살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최악의 위기를 견디도록 도움을 준 세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규명했다. (1) 목적이 담긴 작업 즉 창의력 (2) 서로가 함께한 경험 즉 사랑 (3) 어려움에 직면할 용기 즉 태도이다.4 대단히 흥미롭게도 이 세 요소는 그리스도교에서도 고통을 견디도록 해 주는 근본적인 가치들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주위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는 일 그리고 긍휼한 마음으로 보살피는 일을 부여받았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사랑의 관계를 우리 안에 재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셋째로 우리는 의로운 왕의 자녀들이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악을 물리치셨고 다시 오실 때 그 악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신 분과 같은 편임을 알기에 오늘 우리도 용기 있게 악에 맞설 수 있다.
1 아마도 이 질문들에 대한 최선의 답변 중 하나가 다음의 책에 있을 것이다. John Peckham, Theodicy of Love: Cosmic Conflict and the Problem of Evil (Grand Rapids: Baker, 2018)
2 영어 단어 폴레믹(polemic)은 전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폴레모스(polemos)에서 왔다.
3 오스카 쿨만은 “마지막 때는 이미 왔지만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진술함으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즉 그리스도의 초림은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다는 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마지막 날들의 마지막 표가 될 것이다. 다음을 참고할 것.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The Primitive Christian Conception of Time and History, trans. Floyd V. Filson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p. 145
4 빅토르 프랑클, 『삶의 의미를 찾아서』
올레크 코스튜크(Ph.D.) 애드벤트헬스 대학교의 신학과 부교수이며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가족과 같이 지내고 있다.
발문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복잡하고 독특한 삶에 대한 본질적 사실을 입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