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믿음
또다시 실패!
그런데 정말 실패일까?
호머 트레카틴
거기에 그 녀석이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위에 있는 그 녀석의 흔들거리는 다리와 흰색으로 칠한 목덜미를 불길이 서서히 삼키고 있었다. 나는 불타는 쓰레기 더미로 헐떡거리며 달려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걸작품을 긴 막대기로 끄집어냈다. 그것은 내가 만든 목마였다. 손도끼로 판자를 쪼개어 똑같은 길이로 자르고, 휘어진 못을 도끼의 등으로 두드려 박고, 창고 벽을 칠하고 남은 백색 페인트로 예쁘게 칠까지 했다.
나도 인정한다. 솔직히 그 말이 멋지다고는 할 수 없다. 잘 서지도 못했고 아직 아기인 남동생이 올라타면 부서질 정도로 약했다. 그렇다고 그걸 불태워 버리다니!
까맣게 탄 목마의 다리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등을 며칠 동안 쳐다보면서 그 목마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더 지나서 나는 그것을 다시 소각장에 밀어 넣었다. 불에 타고 남은 못들 때문에, 거기서 나중에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 타이어에 펑크가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몇 년이 지났다. 나이를 더 먹은 만큼 실력도 좋아졌다. 우리 가족에게는 버몬트 숲에 소박한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나무로 만든 조리대와 옥외 화장실이 딸려 있었고 물은 샘에서 양동이로 길러 와야 했다.
재미난 곳이었지만 일주일간 머물다 보면 약간은 지루했고 특히 십 대 아이에게는 더 그랬다. 어느 여름방학 때 나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다가 꿈틀거리는 나의 실력을 입증할 프로젝트를 생각해 냈다.
가만 보니 엄마와 누이들이 오두막 문으로 올라갈 때 힘들어했다. 계단으로 쓰려고 쌓아 놓은 돌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문득 멋진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계단을 만들어야겠어!’
나는 난간으로 쓰던 자작나무 기둥 두 개를 잘랐다. 몇 시간 동안 자르고 다듬고 못질을 한 뒤 아주 그럴듯한 계단을 만들었다. 이 정도면 나중에 세계에서 가장 멋진 건물의 계단도 디자인할 수 있겠다 싶어서 가슴이 들떴다.
그때 옆에서 어떤 동작이 포착됐다. 어린 남동생들이 ‘하나, 둘, 셋’을 세며 슬로 모션처럼 출입구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이 착지했을 때 나의 아름다운 계단은 와지끈 무너져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말았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속으로는 뼈저린 사실을 통감했다. 나의 계단은 현장 검증에서 불합격했다.
***
기독교 저술가이자 강사인 존 C. 맥스웰은 자신의 책 『인생 성공의 법칙』*에서 도예 교사가 진행한 실험을 소개한다. 학생 절반의 작품은 양적으로 평가하고 나머지 절반의 작품은 질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양적 평가 그룹’은 총무게가 7kg이 되도록 도자기들을 만들기만 하면 A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최종 작품이 어떤 모양인지도 상관없었다. 성적은 도자기의 무게로만 결정되었다.
‘질적 평가 그룹’은 자신들의 한 작품만으로 점수를 매긴다. 그들은 서너 가지 다른 모양, 다른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한 작품만 잘 만들면 그 작품의 형태, 창의성, 심미성, 구조 등의 요소로 평가받았다.
마지막 수업 때 양적 평가 그룹이 도자기를 담은 상자들을 저울로 질질 끌고 갔다. 많은 학생이 A학점을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 작품은 아주 멋졌다. 그들은 아주 멋진 작품을 여럿 만들어 냈다.
질적 평가 그룹의 작품들을 평가할 때는 감탄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멋들어진 도예 작품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작품을 만들려고 오랜 시간을 들였으나 실패가 두려운 나머지 쓸모 있고 예쁜 도자기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양적 평가 그룹은 이것저것 시도하고 실패한 덕분에 여러 기술을 습득해 놀라운 작품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실패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실패는 꿈을 차단하는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실패는 꿈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디딤돌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것은 전혀 실패가 아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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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예수님은 바다를 잔잔케 한 다음 처참한 두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그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 달려갔고 2천 마리나 되는 돼지가 절벽으로 뛰어내려 물에 빠졌다. 소문이 급속히 퍼졌고 사람들은 곧바로 달려와 점잖게 예수님을 마을에서 내쫓았다(눅 8:26~39; 마 8:28~34; 막 5:1~20).
예수님은 실패한 것일까? 그날 아버지의 뜻을 잘못 파악하신 것일까? 서둘러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신 것일까?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두 광인의 증언을 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나중에 그분이 다시 나타나자 우르르 몰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마 14:34~36; 막 6:53~56 참조).
하나님이 인생을 보시는 방식은 우리와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한 것이 실제로는 전혀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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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와 예쁘게 포장된 작은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엄마는 불꽃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고 압착 고무공 마개가 달린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여보!”라고 외치며 엄마는 아빠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압착 고무공 마개가 있는 작은 유리병을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궁금했다.
“이건 향수야.”라고 엄마가 말했다. 병에서는 라일락 향기가 났다.
엄마는 그 작은 병을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나와 동생 로웰은 결심했다. ‘엄마가 작은 향수병으로 그렇게 기뻐했다면 우리는 향수를 한 양동이 만들어 드리자고.’
물론 우리는 향수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다. 그래서 아빠에게 방법을 여쭈었다.
“그건 말이야.” 아빠가 말했다. “벌레즙과 라일락 꽃잎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아빠를 믿었다.
라일락은 닭장 주변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파리도 많이 잡았다. 엄마가 보지 않을 때 부엌에 가서 파이 접시를 가져왔고 수풀 뒤에서 꽃잎을 엄청나게 많이 따서 파이 접시에 올려 놓았다. 그런 다음 라일락 꽃잎 위에 죽은 파리들을 뿌렸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로엘은 그것을 익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방에 가져가 익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닭장 위로 올라가서 지붕에 있는 작은 창문을 열었다. 거기에 팬을 내놓고 이 귀중한 혼합물에 물을 부어 뜨거운 햇살에 그것이 익도록 했다.
한 시간 뒤에 우리가 돌아와서 꽃잎과 파리가 있는 파이 접시의 냄새를 맡았지만 아직 냄새가 나지 않았다. 다시 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 혼합물을 짓이긴 뒤 이튿날 오후까지 계속 확인했다. 으깨진 꽃잎들과 짓이겨진 파리들의 썩은 더미로부터 우리는 코를 막고 꽁무니를 뺐다.
향수를 만들려고 했던 그 일을 우리는 엄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우리 모두는 그 일을 잊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기억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향수를 만들려다가 실패한 일도 소개했고, 그 이야기를 부모님께 적어서 보냈다. 부모님은 그 글을 아주 즐겁게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죽은 파리와 라일락꽃으로 향수를 만들려고 했다는 글을 읽고 있는 어젯밤의 엄마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엄마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아유, 이 사랑스런 녀석들’이라고 했단다.”
그 순간 나는 실패에 대해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엄마는 선물이 아니라 어린 아들들의 마음에 깃든 사랑을 알았을 때 기뻐하셨다. 따라서 나는 전혀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향수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던 것이고 그 일에 성공한 셈이다.
분명히 나는 유명한 향수 제조업자가 될 가망은 없었다. 사실 다시는 향수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이런 성경절을 읽었다. “죽은 파리들이 향기름을 악취가 나게 만드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느니라”(전 10:1). 우리 형제가 진작 이 구절을 읽었다면 여러 곤경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치 있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엄마가 보듯이 우리를 보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무엇을 드렸고 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보지 않으신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도 냄새나는 파리와 꽃잎 덩어리보다 나을 게 없다. 그분은 자기를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려는 우리의 사랑 어린 마음을 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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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외치셨다. 그를 가까이 따랐던 자들에게 이것은 또 다른 실패로 보였다. 예수님은 너무나 자주 적절치 않은 사람들에게 적절치 않은 것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떠나야 할 때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이것은 얼마나 큰 인생의 낭비이고 잠재력의 낭비인가! 얼마나 끔찍한 실패인가!
그렇지만 그것은 전혀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패배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승리의 함성이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온 우주가 이제까지 보았던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물론 요한계시록 7장 9~10절에 묘사된 광경이 일어날 때까지 그것은 전혀 승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 그곳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이 전혀 실패가 아니었음이 마침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실패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의 눈에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돌이켜 보면 삶이 엉망이었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실패를 했든 혹은 실패할 것처럼 보이든 다음 단계는 동일하다. 즉 그것을 하나님께 말하라. 그분의 손을 잡으라. 일어나서 다시, 다시, 다시 시도하라. 왜냐하면 유일한 진짜 실패는 우리가 일어서지 않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 존 맥스웰,『인생 성공의 법칙(Failing Forward)』(비전과 리더십, 2003년)
호머 트레카틴 목회자, 교사, 행정자로 일했다. 중동에서 여러 해 사역했고 미국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있는 대총회의 글로벌 미션, 선교부에서 일한 뒤 은퇴했다.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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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실패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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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향수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던 것이고 그 일에 성공한 셈이다.